아~ 어머니, 당신은 아름다웠습니다
아~ 어머니, 당신은 아름다웠습니다
  • 최순희
  • 승인 2012.01.25 12:5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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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희의 뾰족한 이야기]어머니를 보낸 딸의 사모곡

한동안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정리되지 않는 느낌과 생각을 어찌 말로 표현하고 글로 쓸 수 있으랴. 그러나 늘 응원하고 뒷바라지해주시던 어머니의 급작스런 선종 이후, 그동안 어떻게 나의 삶이 지탱되어왔는지는 단순하고 선명해졌다.

어머니는 삶을 시작하도록 숨을 불어넣어주었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 폭포처럼 쏟아지던 축복의 말씀을 쏟아 주시던 분이었다. 그녀의 자식에 대한 신뢰와 응원은 전투하듯 살아가던 나의 일상에 매순간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날짜를 세어보는 편이 아닌데, 어머니의 부재를 하루하루를 세게 되었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아직 어리버리, 우왕좌왕이다. 무슨 말로 이 갑작스런 일상의 변화를 표현해야하는지를 몰라 말을 잃은 것이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란 걸 순간순간 확인하는 당황스러운 상태가 이어졌다. 그저 그분의 헌신에 기대어 산 것에 감사와 죄송함을 뒤섞어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가장 가까이 마지막을 지켜본 자녀로서 어머니를 잃은 후 그녀의 삶 가운데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그건 한 인간에 대한 마지막 기억, 그리고 살아있는 내가 걸어야 할 마지막 모습을 두루 살피라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미리 걱정했던 삶의 끝,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와는 달리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기실 우리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소멸이라는 관점에 서서 바라보는 추하고 기피해야 할 두려움이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죽음(死)과 사자(死者)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며, 죽음과 사자에 얽힌 모든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가 집에 다녀오는 집안 식구를 집안으로 들일 때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남아있다. 부정한 기운이 들어 올까봐 치르던 이런 가벼운 의식도 죽음은 '두렵고 피해야 할 부정한 것'으로 각인되는 하나의 의례이다. 장례에 얽힌 풍습은 현재 그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문화를 상징한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 보여주시고 떠나신 어머니

지상에서 삶을 나누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은 가장 의미있는 상징을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회를 이해하려면 장례문화를 보아야 하며, 한사회가 마지막까지 같은 문화권임을 확인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태도와 장례의식이라고 하였다. 장례의식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향해 뿌리는 소금에 대한 기원은 일본의 <고사기, 古史記>에 나오는 신화라는 설이 있다.

고사기는 서기 712년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데, 처음으로 일본 땅을 다스렸다는 남신(男神)인 이자나기노미코토가 황천에서 세상으로 돌아 왔을 때 '황천이 부정한 세계'였다고 고한 다음 더렵혀진 몸을 바닷물로 씻었다는 신화에서 유래한다. 외래문화가 비교적 덜 유입되었다는 우리의 문화 안에서도 이렇게 가까운 과거, 긴 역사에 비해 아주 짧은 시기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의 신화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 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남아 죽음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소련의 우주비행사 블라디미르 치토프는 "일 년 동안 우주를 바라보니, 차츰차츰 지구가 연약하고 귀여운 존재로 비쳐집니다"하고 말한 적이 있다. 지구 안에 사는 우리는 지구를 연약하고 귀여운 존재로 느끼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우주인의 시선은 지구에서 우주로 옮겨져 있었기에 지구에 대해 감성적인 연약하고 귀여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도 보는 시각에 따라 천양지차가 나는 해석이 가능한 것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삶 안에서 죽음을 바라볼 때 슬픔과 두려운,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한 걸음 그것을 떼어 놓을 수 있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많은 자살의 흔적들에서 오히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쳐서 탈출하고자하는 삶의 허무를 발견할 수 있다. 생에 너무 집착한 결과이다. 생의 시점에서만 죽음을 바라보는 이 시선을 거두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스스로 추스르지 못하는 것을 알았는지, 여기저기에서 응원의 메시지가 날라 왔다. 모두들 가까이 나를 지켜봤던 사람들. 그들은 늦게 젖을 떼고 낯선 환경에 부딪힌 아이처럼 당황하는 나에게 건강과 일상을 염려한다. 그렇다. 사람으로 살고 있는 이상 삶에는 사람이 곁에 있다. 사람이 있어 절망도 찾아오지만, 또한 사람이 있어 우리는 서로 희망을 나눈다.

이제 나의 삶에 대한 시선을 어머니의 부재에만 고정하지 않아야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고통이라는 이분법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시점의 이동이 있어야 배려가 생긴다. 배려라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숨을 불어넣어 삶을 선물하신 것 뿐만 아니라 그 삶을 나눌 이웃들과 더불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연약하고 귀여운 존재로서, 서로를 위로하고 배려하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가셨는지 모른다. 설 연휴가 막 지났다.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보듬고 시선의 이동을 통해 생기는 여유로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하는 시간이다. 

   
 

최순희, 대전출생, 충남대, 목원대(석사), 충남대 언론정보대학원(박사수료), 대전MBC R·TV 프로듀서, 편성·보도제작부 부장, 미디어 포럼 대표(현), 홍익대, 목원대 출강(현), 이메일 : luxcia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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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영 2012-01-25 13:18:31
우선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어머님께서 자식에대한사랑이대단하셨군요
하늘나라에서도 따님을지켜보시고계실거예요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