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요맘때의 일기
Where the Water Meets the Sky (물이 하늘을 만나는 곳). 우리가 수평선이라고 밋밋하게 부르는 그것을 이 세상 어느 동네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마음이 순수하니 언어도 순수한가보다. 우리는 순수함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생각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방학이라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다. 그 시간 역시 몹시도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겠지만, 지금 나의 상상 속의 그 시간은 모든 일상에서의 일탈이 용서되는 시간이다. 행복을 고민하는 시간이다.
잠시 이혁규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좋다. 언변과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다. 공포의 마케팅(성적 나쁘면 넌 좋은 대학 못 들어가. 좋은 대학 못 가면 인생이 loser가 돼.)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교육적인 교육,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열심인 학교 교육, 학교는 정의로운 공동체인가,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 간의 권력 투쟁, 공동체의 부재, 1만 시간의 법칙의 예외인 가르치기, 학습된 무기력, 상상력의 확장, 미래는 지금과 다를 것인가, 수능과 내신 어는 게 더 비교육적인 시험인가, 힐 베르트 마이어의 ‘좋은 수업’이란? 등등을 얘기하고 있다. 오늘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나는 오늘도 배울 게 너무 많은 미숙한 교사다.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TV를 본다. 상주에 사드(THAAD)가 배치될 거라고, 이제 더 이상 의미 없는 비판이나 갈등의 멘트 하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대통령께서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곧이어 아나운서 두 명이 나와 싸드의 전자파 위험성이 염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며 기존 레이더 지역의 안전성 실험 결과를 들먹이며 멍청하기 그지없는 나 같은 국민을 안심시킨다. 이제 싸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주 지역 주민들의 문제로 전환되어 버린다. 보상이라는 말이 크게 돋보인다. 삶의 터전에서 죽음의 위협에 굴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 주어질 보상은 과연 목숨보다 더 큰 어떤 것일까?
프랑스의 니스는 또 IS의 테러다. 징그럽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싶다. 이제는 처절하지도 않은 일상화된 뉴스가 되어버린 테러. 남의 나라 이야기여서 아무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생명은 가볍다. 이렇게도 가벼워져 버렸다.
방학식을 끝냈다. 오늘 미칠 듯이 마음이 홀가분해지신 박 선생님은 머리에 꽃 대신 빨간 고무줄을 다셨다. 마음이 예쁘신 분이다. 정직하고 예민하고, 여리신 분이다. 아이들에게 올 인하시고도 미안해 하시는 분... 아이들은 상을 타고, 박수를 치고, 웃고 떠들며 방학을 맞는다. 하지만 내심 지금 괴로울 것이다. 성적표에 써진 작은 숫자들의 무리는 아이들의 영혼을 파고들어 자존감을 부수고 삶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미래를 어둡게 보게 하고, 아이들의 위장을 파고들어 밥맛도 소화도 영 아닌 상태로 마비시켜 버린다. 하지만 또 아이들은 복원력이 강하다. 삼삼오오 기숙사에 들어가더니 짐 가방을 싸고 나와 내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예쁘고 근사한 사복 차림으로 덜 자란 나무 그늘에 서서 픽업하러 오실 엄마 아빠들을 기다린다. 이렇게 한 학기가 끝났다.
어제 우리 학년 특색 인문학 프로그램인 독서 포럼 ‘백석 시선집’을 하면서 참 행복했다. 시를 낭송하며, 노래하며, 연극을 하며, 박수치고 울고 웃고... 김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이 행복하고 성장했다. 그럼 된 거다. 힘든 적응의 시간을 뿌듯이 버텨낸 아이들은 이제 잘 익은 수박처럼 삶의 달디 단 맛을 볼 것이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 1학기는 참 감사하다. 칼 같은 일처리에 쿨하고 욕심 없는 변 샘, 내가 참 좋아하는 생각의 물줄기를 쭉쭉 내뿜는 이쁜 김 샘, 믿음직하고 진지하고 마냥 사람 좋은 하 샘, 똑똑하고 스마트하고 게다가 선배들을 잘 따라 주는 이 샘, 예의바르고 순수하고 게다가 허접한 면이 있어 더욱 좋은 박 샘, 2학기에 더 성장하고 아이들 더 성장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생각과 활동을 공유하며 내가 속한 이 공동체에서 인정과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고마운 시간이었노라고 나는 올 1학기를 정의하겠다.
2017. 6월 중순 어느 날
야간자습지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습관처럼 내 맘대로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I deserve a rest tonight. I worked hard with all my might.
그래. 집에 가면 식탁 위에 어지러이 있을 설거지거리도 못 본 척하고, 허물처럼 방 여기저기 벗겨져 있을 빨랫감도 과감히 외면하고, 한 두 시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봐야지. 그럴 자격이 나에겐 있어. 왜? 난 8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려 14시간을 학교에서 열심히 일했거든. 음악에서도 음표만큼 중요한 게 쉼표라잖아? I really deserve a full rest.
“다녀오셨어요?”하며 인사하는 막내에게 “저녁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 10시다. 이 시간까지 저녁을 안 먹었을 리도 만무하지만 사실 먹었을 리도 없어야 한다. 왜냐면 엄마인 나는 이제야 퇴근하고 아빠인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인데 열두 살 남자 아이가 혼자 저녁을 지어 먹을 경우의 수는 아주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내는 저녁으로 김치 볶음밥을 해 먹은 과정을 시시콜콜 얘기하곤 사뭇 뿌듯해한다. 참기름보다 들기름이 좋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들기름 넣고 김치를 볶았다고 하는데 보니 기름병에 귀한 기름이 반이나 축났다. 왠지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배고프면 자기가 알아서 밥도 챙겨먹고 그래야지 하며 엄마로서의 직무유기를 아이의 독립성 신장이라는 포장으로 살짝 덮는다.
열여덟 살 먹은 학교 아이들과는 점심과 저녁식사를 늘 같이 하면서, 밥 안 먹고 있는 애 있나 챙기고, 급식에 대한 불만 있나 챙기고, 냉동식품과 신선 식품 비율 챙기고, 너무 자주 나오는 메뉴는 없나 챙기고.... 그런데 정작 이제 막 성장기인 내 아이는 저녁 시간에 뭘 먹는지 학교 급식은 만족하는지 까마득히 묻지도 생각지도 않는 내가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밥만 그런 게 아니다. 무슨 숙제가 있는 지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학교는 당연히 잘 다녀왔겠고, 숙제는 요즘 안 내는 추세인가보다 한다. 행여 숙제가 있더라도 어련히 알아서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다 했을 거고 ... 이렇게 근거 없는 확신을 하면서 터무니없이 맘 편해 한다.
우리학교 애들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인 요즘을 수행평가 시즌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자살예방교육을 하는 강사 선생님에게 ‘자살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해요.’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로 수행평가가 폭탄처럼 우르르 쏟아진다. 칠판에 빼곡히 적힌 수행평가 제목과 데드라인을 세어보니 열 두 개의 다양한 수행평가가 있다. 심지어 과목별이 아닌 교사별 수행평가도 심심치 않게 있다. 이건 학대 수준이다. 오죽하면 수행평가 때문에 시험공부 할 시간도 없다고 불평한다. 정시 전형으로 마음을 굳힌 학생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그 아이들도 학생부 종합전형과 관련된 내신 또는 교과 활동에 대해 완벽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교사인 내가 생각해도 학교는 비교육적인 걸 넘어 반교육적인 장소일 때가 많다. 수행평가는 수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평가여야 하고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둔 거라야 한다고 이론적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많은 교사들에게 수행평가는 사실 일회성을 띤 힘들고 번거로운 평가유형이고, 학생들에게도 지필평가 못지않은 커다란 stressor다. 더군다나 발표나 프로젝트형 수행평가는 아이들의 수면 시간을 빼앗는 주범이고, 밤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느라 정작 다음 날 수업 시간에는 무거운 눈꺼풀과의 싸움으로 중요한 걸 놓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세상 편한 열 두 살 내 아이도 조만간 이런 중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이러저러한 미안한 마음에 아이에게 베개를 가져오라 하고는 다리 베고 누우라고 한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 자세다. 등도 살살 긁어주고, 머리카락도 쓰담쓰담(?) 해 주고, 발가락 마사지도 해준다. 아이가 TV 채널을 EBS로 돌린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다큐를 보는 게 더 잘 어울린다며 이 엄마의 지성적 이미지 쇄신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채널을 양보한다.
“가짜 인재 vs. 진짜 인재”라는 제목의 다큐가 나온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 또는 성공에 대한 열심과 집착을 밑바탕으로 다양한 사교육을 받은 수많은 소위 상위권 ‘인재’들의 진위성에 대한 질문이 계속된다. 타이거 맘들이 많은 홍콩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최소 하루 한 시간 노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법 제정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아니, 노는 걸 법으로 강제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서 삶을 버텨낼 힘은 어릴 때 놀던 힘에서 나온다는데... “Excellent Sheep”이라는 책을 쓴 예일대 교수가 미국의 교육은 진짜 인재를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고백을 한다. 아이비리그가 키워내는 건 법, 금융, 의학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전문가일 뿐 이들은 진정한 인재가 아니라고 한다.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고, 그래서 실패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한 번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로 단정 짓는 인재들. 인생에서 딴 짓이라고 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고 부모나 교사라는 목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 늘 푸른 초장 안으로 몰려 들어가서 그 안에서 살찌워지는 양들과 같은 인재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고 남을 위해서는 순수하게 뭔가 해 본 경험이 없는 인재들. 정말 가장 쉬운 건 공부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인재들에 대해 날 선 지적을 한다.
GIST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무한도전 프로젝트’가 소개된다. 공부와 경쟁 외에 의미 있는 딴 짓을 하도록 6개월을 주고 어떤 변화와 성장이 있었는지를 확인해 보는 프로젝트다. 최고의 두뇌를 가진 이 학생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진짜 인재’로 거듭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나는 내가 교사로서 가짜 인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교실 안에 늘 가두고, 친구라는 말을 가장 좋은 경쟁자라는 말로 바꿔놓고, 현재를 재물로 바쳐 보다 나은 미래를 보상으로 받아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가짜 인재를 기르는 가짜 교육자는 아닐까? 정직하게 답하기 두렵다.
“엄마가 훨씬 나아.” 아이가 말한다. 매 끼니 밥 챙겨주고 보약도 챙겨주고 그러면서 틀린 시험문제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학원으로 부지런히 애들을 몰고 다니는 홍콩의 타이거 맘 보다는 차라리 제 때 끼니 챙겨주지 않더라도 자식을 공부와 시험의 노예로 사육하지 않는 엄마가 더 낫다는 거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자기는 진짜 인재 같다고. 웃음을 꾹 참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 물었더니, 진짜 인재는 부모나 교사가 뭘 하라고 했을 때 순종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왜 해야 되는 지 물어보고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사람인데 자기는 후자에 속한다고. 글쎄.. 아마 아이는 자기주도성과 부모 말 안 듣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 같다. 인재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면 사람은 뭔가에 쓸모가 있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잖은가? 어느 시인이 그랬다. “요즘 출세 좋아하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출세지요. 나, 이거 하나가 있기 위해 태양과 물, 나무와 풀 한포기까지, 이 지구, 아니 우주 전체가 있어야”된다고. “그러니 그대나 나나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가요”라고 노래한다.
오늘도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교실 안에 몰아넣고 딴 짓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는 excellent sheep으로 살아가라고 다그치면서 나 혼자 훌륭한 교사 코스프레를 한 게 아닌가, 아이들에게 한 없이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