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은 시베리아의 파리였다
바이칼은 시베리아의 파리였다
  • 김선미
  • 승인 2017.09.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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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원을 달려 바이칼에 가다]<5>데카브리스트들의 도시, 이르쿠츠크

남편 발목에 채워진 차디 찬 족쇄에 엎드려 입 맞추다

   유배당한 남편을 좇아 가장 먼저 시베리아로 달려간 예카테리나와 데카브리스트들이 묻힌 즈나멘스키 수도원.

 아무리 지치고 기운이 없어도 그곳만은 꼭 들러야 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과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인 ‘발콘스키’와 ‘트루베츠코이의 집’을 방문하지 않고 어찌 데카브리스트들의 도시, 이르쿠츠크에 다녀왔다고 할 수 있으랴. 그것이 비록 몇 시간짜리 눈도장 찍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화려한 러시아 정교회와 달리 정갈한 즈나멘스키 수도원 입구.

 몽골-러시아 국경을 육로로 넘고 알혼섬을 다녀왔을 때는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러저러한 이상 신호를 보내던 몸, 마음이 완전 방전된 상태였다. 약도 별무소용이었다. 귀국 일정을 앞당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었던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집.

그래도 십대 시절부터 오랜 세월 품어왔던 순수한 열망이 억울하고, 또 언제 오랴 싶은 생각에 지하 수직 갱도로 떨어지는 몸을 추슬러 간신히 시내를 둘러보았다. 오죽하면 이 도시가 처음인 여행객이라면 대부분 찾는다는 ‘영원의 불꽃’과 ‘모스크바 문’도 못 봤을까.

스스로 특권 내려놓은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

   데카브리스트 반란의 주동자였던 트루베츠코이 백작의 집.

누군가는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라고 했던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난’ 혹은 ‘혁명’. 1825년 12월14일 니콜라이 1세 즉위식 날, 일단의 청년 장교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맹세 대신 경천동지할 거사를 일으킨다. 이들은 유럽의 자유사상에 영향을 받아 전제주의에 반기를 들고 입헌군주제 도입과 농노제 폐지 등의 사회변혁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혁명이 어디 그렇게 쉽게 오던가.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힌 데카브리스트들의 묘비.

거사 계획이 새나가는 바람에 청년 장교들의 드높은 기개와 이상은 좌절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년 전에 인간존엄성, 자유를 주창하며 전제왕정과 계급제도의 수혜자인 귀족계급이 스스로 특권과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시대를 앞서 실현하려 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의 실패한 혁명은 이후 러시아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처절한 실패의 대가, 죽거나 죽음의 땅 시베리아로 유배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는 청년 장교들의 발목에 채워졌던 쇠사슬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한 젊은 열정이 불러온 실패의 대가는 혹독했다. 5명은 처형됐고 110여 명의 청년 장교들은 동토의 땅,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천km나 떨어진 멀고 먼 혹한의 길을 20kg이 넘는 쇠사슬을 찬 채 유배지로 향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30년 동안 광산에서 강제노역과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의 초상화와 그녀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 발콘스키의 집.

가혹한 대가는 이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남편을 버리면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신분, 재산 등 귀족의 특권을 그대로 누릴 수 있었지만 아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했다.

페트로비치 트루베츠코이 백작의 아내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가 맨 먼저 시베리아로 달려가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차디 찬 족쇄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아내 마리아 발콘스카야 등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의 이야기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와 함께 러시아 문학 곳곳에 녹아 있다.

문학작품에 남은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의 사랑과 헌신

   발콘스키 공작의 아내 마리아가 수를 놓은 푸른색 가리개.

 시인 푸시킨은 ‘젊은 데카브리스의 사랑’이라는 시를 부인들에게 헌사 했다.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검열을 고려해 《러시아의 여인들》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에서 꿋꿋한 젊은 아내들의 헌신과 사랑, 강인함을 담아냈다.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서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시를 인용해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바로 그 시인이다. 발콘스키 공작은 친척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 공작의 모델로 알려졌다.

   당대의 교양인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이르쿠츠크 문화예술의 싹을 틔웠다.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교양인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유형을 끝내고 사면을 받은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변방, 이르쿠츠크에 남아 주민들을 교육하고 시낭송회, 음악회, 연극공연 등을 열어 이르쿠츠크 문화예술의 싹을 틔웠다. 이르쿠츠크가 데카브리스트들이 만든 도시,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러시아의 변방, 이르쿠츠크에 문화예술 싹을 틔우다

   초록색 선을 따라가면 시내 중심가의 관광명소 30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한 도보전용의 ‘그린라인’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고 천천히 걷다가 이르쿠츠크의 ‘그린라인’과 ‘130 크바르탈 지구’를 만났다. 그린라인은 보도에 초록색 줄이 그어진 도보전용 관광길이다. 그린라인에는 유명한 교회들, 역사적 기념물, 유서 깊은 건축물, 박물관, 극장, 광장, 동상 등 30곳이 소개되어 있다. 안내지도나 가이드가 없어도 초록색 선을 따라 걸으면 2~3시간 동안 이르쿠츠크시의 웬만한 관광명소는 대부분 둘러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울란우데와 이르쿠츠크에 많이 남아 있는 러시아 전통 목조가옥들.

 울란우데도 그랬지만 이르쿠츠크 역시 동화 속에 나올법한 처마와 창문 장식이 레이스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목조주택이 많이 남아 있었다. ‘130 크바르탈 지구’는 예전에 있던 목조주택 마을이 화재로 소실된 후 이르쿠츠크시 350주년을 기념해서 쇼핑가와 산책로로 조성한 지역이다. 전통 목조주택을 복원한 오밀조밀하고 예쁜 건물에 펍이나 카페, 레스토랑, 공예품점들이 몰려 있어 관광객들은 물론 현지 젊은이들도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이다.

문화도시, 돈과 구호만이 아닌 안목과 시간의 켜 쌓여야

   ‘130 크바르탈 지구’. 화재로 소실된 목조주택을 복원해 쇼핑가와 산책로를 조성한 이르쿠츠크의 핫 플레이스.

 어쩔 수 없이 몇 안 되는 원도심의 근대유산과 세월의 켜가 담긴 작고 나지막한 건물들, 조붓한 골목길이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고 있는 대전의 현실이 오버랩 됐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문화도시는 무조건 돈을 쏟아 붓고, 거창한 구호를 내세운다고 해서 이뤄지지는 않는다. 돈과 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정 책임자들의 안목과 시간의 켜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일 것이다. <끝>

   레이스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목조주택의 처마와 창문 장식. 울란우데.

 

   울란우데 소비에트 광장 중앙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의 두상.
   이볼긴스키 닷산. 썩지 않는 등신불로 유명한 울란우데 인근에 있는 러시아 최대 규모의 라마불교 사원.
   문화와 예술이 숨 쉬는 보행자 전용 거리인 아르바트. 울란우데.
   아르바트 거리에서 만난 할머니 중창단.
   이르쿠츠크 ‘130 크바르탈 지구’의 젊은 아티스트.
   이르쿠츠크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와 꽃에 둘러싸인 조형물.
   역사박물관 근처의 바닥 분수. 앉아서 쉬거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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