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소망 하나
간절한 소망 하나
  • 강신갑
  • 승인 2012.11.22 14:16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방시인 강신갑의 시로 읽는 '세종']자정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세종시 고향에서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친구 부부의 보금자리

간절한 소망 하나
 

어둠이 쌓여 온 누리가 까만 밤. 고요한 시골동네에 마지막 하나 전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자정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불을 밝히고 서 있는 친구 부부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우리 집 진돗개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하얀 백구의 재롱을 떠는 모습은 설원을 뒹구는 아기 눈사람 같았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젖 뗀 새끼 한 마리를 친구한테 선물했습니다. 일손이 바쁜 중에도 친구 부부는 날아갈 듯이 좋아했습니다. 금방 하얀 눈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만 같은 오후에 불현듯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하얀 눈을 친구와 함께 맞이하고 싶어 친구를 찾았습니다. 

친구 부부와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동창생입니다. 친구는 대전에서 사업을 하였고 친구 부인은 유치원을 경영했습니다. 우연히 접촉할 기회가 있었던 둘 사이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가까워졌고 마침내 결혼하였습니다. 동창 부부가 된 죽마고우들은 귀향하여 보금자리를 틀고 아들 셋을 두었습니다. 사육하는 한우가 이십여 마리 되고 집 주위는 비닐하우스가 온통 흰색의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시골에도 농한기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사시사철 채소를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입니다. 친구 부부는 집 뒤의 배나무밭과 마을 입구의 옥답을 일구는 농사도 하고 있습니다. 친구 부부가 사는 모습은 마치 바쁘게 살아가는 꿀벌과도 비슷합니다. 친구는 동네 이장을 맡아 지역사회의 영농업무에 참여하고 있고 친구 부인은 부녀회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친구 부인이 차려낸 저녁상에는 어머님이 끓여주셨던 것과 같은 구수한 내음이 풍기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대고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에서는 기름기가 졸졸 흐르고 학창시절 도시락 반찬의 단골 메뉴였던 장아찌도 올랐습니다. 밥알을 씹는 소리가 사각사각 나며 입안에 달라붙습니다. 간장 한 가지만으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밥맛입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친구가 직접 농사한 배를 맛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인근 장터에서 농약판매점을 하는 친구와 농협에 다니는 친구가 들이닥쳤습니다. 어릴 적 추억 되살리기와 최근의 살아가는 이야기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셨던 스승님의 근황이며 다른 친구들이 살아가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중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친구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는 등 애타는 고생을 했지만 자연적인 회복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친구 부인에게 내가 준비해간 음료수 한 잔을 권할 때 사양하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친구 부부는 주일이면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친구 부인은 마음씨 곱고 시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며느리로 고향 면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집안에 제사나 행사가 있을 때면 이웃어른들을 모셔다가 식사 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도회지로 나가 홀로 사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가 빨래를 해드리기도 하고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봐 드리기도 합니다. 해마다 배 수확이 끝나면 일부를 동네주민에게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마을 애경사 시에는 부녀회장으로서 부락의 부녀자들과 함께 상부상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친구 부인은 손님이랄 것도 없는 우리를 위해 방 한구석에서 다소곳이 앉아 과일을 깎고 있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고운 얼굴엔 화장기 하나 없지만 살며시 사랑이 샘솟는 정감 어린 모습입니다. 과일을 받쳐 들고 과도를 움직이는 손가락은 우아하게 피어나는 꽃술 같아 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천사가 있다면 그 모습은 어떠할까요? 친구 부인에게 있어 건강악화는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구 부인의 고통은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동네 사람들의 가슴에도 아픔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애절히 동분서주한 친구의 이야기 또한 살아있는 순애보를 읽는 것 같습니다. 나는 친구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엮어진 월간잡지를 일 년 동안 부쳐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밤이 이슥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 올랐습니다. 낮에만 하더라도 막 퍼부을 것 같았던 하얀 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숯덩이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동네 입구의 골목에 다다라 차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친구 부부는 여전히 집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소리쳤습니다.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날씨가 꽤 추워. 어서 들어가 응!"  

친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잘 가거라!"  

친구의 목소리는 시골 겨울 밤하늘에 메아리 되어 애잔하게 흘렀습니다.  

차를 타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새해의 소망을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새해 나의 절실한 소망은 친구 부인의 온전한 쾌유입니다.  

찬바람 깊은 어둠 속에 불 밝히고 나를 배웅하며 서 있는 친구 부부의 모습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오미자의 향기 2012-12-02 08:24:50
새하얀 눈밭에 선생님의 마음도 순백색처럼 빛나 보입니다. 부디 선생님의 염원이 이뤄지길 기도해 봅니다.
* 오랜만에 수필도 담담하게 마음을 적셔오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희영 2012-11-23 16:28:04
부럽다
그림같이 평화로워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