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벌판에서 난 펑크...이를 어쩌나"
"시베리아 벌판에서 난 펑크...이를 어쩌나"
  • 김선미
  • 승인 2017.09.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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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원을 달려 바이칼에 가다]<1>이광수 소설 '유정'의 꿈을 안고 찾아간 바이칼

SUV차량 지붕 위에 캐리어 싣고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평원을 달리다
8월5일~8월17일 몽골 울란바토르-러시아 울란우데-이르쿠츠크-바이칼

   몽골 북쪽 수흐바타르시의 국경지대 새흐니 후툴산 정상에 서면 몽골과 러시아 국경이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셀렝가강은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평원을 지나 울란우데를 거쳐 바이칼호로 흘러든다,

열 몇 살 무렵,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소녀적 감상 때문이었는지 이광수의 《유정》을읽으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투명하다는 바이칼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꿈꾸었다. 그 세월이 수 십 년이 흘렀다. 한 동안은 금단의 땅이어서 감히 생각조차 못했다. 오래전 빗장이 풀렸으나 여전히 달력에는 없는 “Someday(언젠가)…”로만 남았다.

우리에게는 잊혀진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고, 쇠사슬로 서로의 발을 묶고 수 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유배를 떠났던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겪은 혹한의 시베리아는 감히 접고, 한국이 폭염으로 끓어오르던 무렵 짐을 꾸렸다. 8월5일~8월17일까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울란우데를 거쳐 이르쿠츠크, 바이칼에 이른 여정을 5회로 나누어 싣는다.

《유정》을 읽고 키운 소녀시절의 로망, 바이칼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러시아 국경도시 캬흐타에서 울란우데 가는 시베리아 대평원.

SUV 차량으로 몽골 대초원을 달려 몽골-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800여 년 전 몽골제국 기병들이 흙먼지 날리며 말 달려 대륙 이 끝에서 저 끝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렸던 기개를 상상하며  SUV 오프로드야말로 현대판 ‘말’ 아니냐고 우기면서 말이다.

한때는 한 나라였던 초원길의 붉은 두 도시,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울란우데까지의 초원길은 600km가 채 안 되는 거리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육로로 국경넘기가 인내심 시험을 하듯 오래 걸린다 해도 하루 일정이면 되는 거리다. 두 나라의 도시를 잇는 국제버스의 경우 12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넓이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두 나라에 걸친 광활한 벌판과 초원을 직접 내닫아 국경을 통과하는 대신 몽골 다르항을 거쳐 국경지대인 수흐바타르 지역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국경을 넘기로 했다. 

매연 가득한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 낮은 구릉과 초원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도 집들이 적지 않았다. 초록색 양탄자 위에 버섯이 숨어 있듯 하얀색의 게르가 점점이 흩어져 있던 목가적 풍경 대신 멀리서 보아도 작고 허름해 보이는, 우리나라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그런 집들이었다.

  

 조금은 심란하고 어지러운 풍경을 뒤로 하니 풀과 야생화로 뒤덮인 구릉과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고도가 높고 북쪽이어서 그런지 8월인데도 유채꽃이 한창이다. 한 눈에 잡히지 않는 벌판이 온통 노란색으로 일렁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 어디에 동네가 있고 길이 있을까 싶은데 길이 갈라지는 마을입구에는 어김없이 우리의 성황당 같은 돌무더기 위에 푸른색 천을 감싸거나 늘어뜨린 어워(Ovoo)가 나타난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술이나 곡식을 뿌리는 작은 의식과 함께 어워를 돌며 안녕과 소원을 빈다.

   우리의 성황당 같은 몽골 초원의 어워. 일행의 차를 운전한 몽골 청년이 어워를 돌며 안녕과 소원을 비는 의식을 치르는 있는 모습. 이때 신께 바치는 공물로 술과 곡식을 어워 주위에 뿌린다.

드디어 저 푸른 초원에서의 식사. 간이식탁에 파라솔까지 갖춰진 나름 럭셔리한 피크닉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처럼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과 속마음 두터운 잘생긴 로버트 레드포드까지 곁에 있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어쩌랴, 내가 메릴 스트립이 아닌 것을. 

풀밭 위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초원길을 달린다. 십여 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에 띈다. 드문드문 숨은그림처럼 보이던 게르와 방목하는 가축떼 대신 대규모 건물군과 울타리를 친 현대화된 집들이 꽤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형 리조트, 팬션들이다. 이곳도 조만간 과잉 관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해외 유명 관광지처럼 돼가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몽골의 고적인 물 부족 문제를 어떻게 감당할지...

   몽골 국경도시 수흐바타르에서 새흐니 후툴로 가는 길에 만난 침엽수림

북쪽 국경지대인 셀렝게 아이막의 주도 수흐바타르 가는 길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자작나무, 소나무 등 침엽수림이 이어진다. 국경관리소가 있는 새흐니 후툴산(아름다운 산)에 올랐다.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평원을 지나 울란우데를 거쳐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가는 셀렝가강을 비롯해 세 강이 합류하는 이곳의 정상에 서면 몽골과 러시아 국경이 보인다.

드디어 국경을 넘는 날이다. 몽골 출입국관리소가 있는 국경도시 알탄 불라크(황금의 샘)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차량행렬이 길지 않다. 차도 별로 없는데 국경 통과하는데 4-5시간이 걸린다고? 설마? 하필이면 점심시간까지 겹쳤다.

   몽골 국경도시 알탄 불라크.

 출입국관리소 바로 앞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러시아에서의 느린 일처리와 한없는 기다림의 조짐은 그때부터였다. 핸드 드립 커피를 시킨 것도 아니고, 5명이 우리나라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원두커피 4잔과 믹스커피 1잔을 시켰는데 세상에나! 각 개인에게 한 잔씩 따로따로 가져다주는 것만으로도 속 터져 죽을 지경인데 그마저도 커피 따로, 스푼 따로, 뚜껑 따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러시아 입국을 기다리는 차량들. 몽골 측 게이트에서 러시아 출입국사무소 마지막 게이트까지 200m정도를 통과하는데 무려 5시간이나 걸렸다.

 몽골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겨우 러시아 측 게이트를 통과하니 이번에는 출입국 관리소 앞에서 시간이 멈춘다. 차안에 갇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도무지 바쁠 것 없는 무표정한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무비자국인 러시아에서 그 중요하다는 입국 카드를 나눠준다. 그런데 멘붕이다. 확대경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보험약관처럼 깨알 같은 글씨가 밀림처럼 채워진 손바닥만 한 낯선 나라의 ‘공문서’를 무슨 수로 채워 넣으라고?

어렵게 입국 카드를 작성했으면 뭐 해? 1시간 이상 차들이 꼼짝도 안 하는 걸. 그런데도 누구 하나 감히 러시아 관리한테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정의의 사도는 있게 마련.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몽골인들의 입국 카드와 차량 카드를 써주며 출입국 관리소 직원에게 언성을 높여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놈의 입국 카드가 문제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바라본 러시아 국경지대

 이번에는 짐 검사를 하는 검색대 통과라는 어마 무시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짐이란 짐은 모조리 꺼내 내부가 보이도록 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량 검색은 전쟁 지역 통과가 이보다 더할까 싶을 정도였다.

차량 밑바닥을 샅샅이 훑는 것은 기본이고 연료통 마개까지 열어 검사를 한다.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로 일부 자치공화국과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다 최근 마약 밀반입 문제 때문에 검색이 삼엄하다고는 해도 외부인 눈에는 몽골인에 대한 무시와 하대로 읽혔다.

   러시아 국경도시 캬흐타의 창문이 예쁜 러시아 전통 목조가옥들.

간난신고, 인내심 고갈 끝에 마지막 게이트까지 빠져 나오니 러시아 국경도시 캬흐타다. 몽골 측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커피 마신 시간까지 합하니 고작 200m 정도 통과하는데 무려 5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국제열차의 국경통과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며 단체 관광객의 경우 이 보다는 느슨한 것 같다.

캬흐타에서 울란우데까지 도로 사정이 좋으면 2시간, 늦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지 싶었다. 그러나 포장이 잘 된 쭉쭉 뻗은 도로는 잠간, 설상가상으로 공사 중인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의 도로에서 타이어가 펑크까지 났다.

   러시아 국경을 넘으니 몽골 초원과는 닮은 듯 다른 풍경이 펼쳐진 시베리아 대평원.

 오늘 중으로 울란우데에 갈 수나 있을까? 내심 스페어타이어가 울란우데까지 버텨 줄 수 있을지 조마조마 하며 몽골 초원과 닮은 듯 다른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려 드디어 울란우데에 입성했다. 

이틀 동안의 여정에 몸이 먼저 지쳤지만 내 인생에서 언제 또다시 오프로드 차량 지붕 위에 캐리어를 싣고 지평선이 어디인지도 모를, 대륙적 스케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몽골-시베리아 초원길을 달려 볼 것인가.

   붉은 두 도시 울란바토르와 울란우데를 잇는 대초원길의 석양
   몽골 다르항시 외곽에 있는 마을 풍경
   다르항에서 만난 예쁜 커튼이 드리워진 화장실.
   물을 채운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몽골의 간이수도 시설(?). 수도꼭지 틀 듯 거꾸로 매달린 병 마개를 열면 조금씩 물이 흘러나온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척박한 환경이 만들어낸 생활의 지혜다.
   양고기와 채소를 달군 돌과 함께 익혀내는 몽골 전통음식 허르헉 재료를 사기위해 들렀던 수흐바타르의 작은 재래시장. 머리 땋듯 엮은 마늘이 눈길을 끈다.
   일행이 머물렀던 국경도시 알탄 불라크에서 멀지 않았던 초원 속의 캠핑장.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캠핑장 전기불이 끊어지자 올리브유로 호롱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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