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재를 천연기념물로 신청했나"
"왜 분재를 천연기념물로 신청했나"
  • 임비호
  • 승인 2017.07.28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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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세종시 상징나무<3> 효심이 만든 '봉산리 향나무'
   봉신리 향나무, 용트림하듯 엄청난 수형을 자랑하고 있다.

소나무가 현재 세종시의 시목(市木)이라면 향나무는 세종시의 전신인 연기군의 군목(郡木)이었다. 향나무가 연기군의 군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치원 봉산리에 있는 향나무 때문이다. ‘봉산리 향나무’는 오랜 세월에서 배어나오는 신묘한 자태를 가지고 있어 1984년 천연기념물 제 321호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이란 말은 국보와 같은 뜻 다른 지칭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국가차원에서 보전하고자 대상에 따라서 명칭을 달리한다. 춤·노래같이 무형일 경우는 무형문화재, 서적, 건축물 등 대상이 보이거나 결과물들이 현존할 때는 유형문화재로 분류한다. 유형문화재는 또 대상이 건축물이나 서적 같은 경우는 국보나 보물이라고 지칭하고, 자연물일 경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칭한다. 봉산리 향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보급 자연물이라는 말이다.

‘봉산리 향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이유는 450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 살았다는 것과 경외를 자아내는 신비스런 수형(樹形) 때문이다. 성인이 두 팔로 감싸 안을 수 없을 정도의 기둥줄기는 하늘을 오르는 용트림을 상상하게 하고, 옆가지들은 녹색 정원을 연상케 하는 둥글면서 넓게 펼쳐져 신비스런 자태를 보여 주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82년도에 천연기념물로 신청서를 냈을 때 당담자가 사진을 보고 하는 말

이 “왜 분재를 천연기념물로 신청했냐”고 하였다니 일반 상식을 뛰어 넘는 형태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보수 후의 봉산리 향나무 모습

‘봉산리 향나무’가 이런 자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수종(樹種)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나무라고 하면 높이 20m정도 자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다른 모양의 향나무들도 있다. 땅과 맞대어 옆으로 자라는 것은 눈향나무라 하고, 봉산리 향나무처럼 줄기가 일정정도 크면 가지가 옆으로 자라는 뚝향나무도 있다.

뚝향나무는 둑에서 자란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우리나라 자생종이다. 봉산리 향나무가 특이한 자태를 자아내는 것은 나무 종이 뚝향나무이기 때문이다. 봉산리 향나무와 수형이 비슷한 것은 하회마을 인근 안동시 주하리 경류정 종택에도 있다. 천연기념물 제314호로 지정된 이곳의 정원수도 뚝향나무이다. 하여 봉산리 향나무의 정확한 명칭은 “봉산리 뚝향나무”라고 해야 한다.

‘봉산리 뚝향나무’는 강화 최씨 집안이 정원수로 심은 것이라 한다. 우리 선조들은 향나무를 정원수나 우물가에 식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향나무가 방향제, 탈취제 기능과 신성과 벽사(辟邪)의 상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향나무는 나무 자체에서 향기가 난다. 또한 향나무 심재로 만든 향을 피우면 역한 냄새도 없어진다. 이런 향나무의 방향제 기능은 시신의 냄새를 없애는 재료로도 사용되었고, 확장되어 제사를 지낼 때 연기를 피워 인간의 정성이 하늘까지 닿을 수 있게 하는 번제용품으로도 사용되었다.

향나무의 기능이 방향제, 탈취제 그리고 인간의 정성을 나타내는 신성의 의미를 가지게 되니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과 액담을 막을 수 있는 벽사(辟邪)의 의미까지 확대시켰다. 우리 조상들이 향나무를 정원수로 심었다는 것은 집안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청정한 기운을 집안에 두고 싶다는 주술적인 바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최회 효자문. 효자 성균관생원 최회지문이라고 쓰여져 있다.

‘봉산리 뚝향나무’는 일명 효자나무라 불린다.

당시의 봉산리는 사대부 집안이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장소에 적합한 곳이었다. 위치적으로는 사대부들이 직접적인 관직은 아니지만 조정의 정보를 쉽게 들을 수 있고, 경제적인 토대를 가질 수 있는 내포지역의 언저리이다. 교통 편리성에서는 임금이 있는 서울과 연결되는 삼남대로의 바로 옆 지선 마을이다. 그리고 지형적으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즉 뒤에는 오봉산이 있고, 옆으로 내창천이 돌아들어 주변에 풍부한 농토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 최완이란 분이 조선 중종 때 처음으로 터를 잡으셨다. 최완이란 분은 뚝향나무를 심은 최승용의 부친이다. 봉산리에 터를 잡으셨던 부친이 돌아가시자 효심 깊은 아들 최승용은 서울에서 내려와 부모의 은덕를 기리는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봉산리 뚝향나무를 정원수로 심은 것이다.

봉산리 뚝향나무를 심은 최승용도 효자지만, 봉산리 강화 최씨 집안의 효심 전통은 유명하다. 아들 최회도 효자로 인정받아 효자문(세종시 향토유적 3호)이 있는가 하면 8대에 걸쳐 15명의 효자와 열부를 배출하였다 하니 가히 집안의 효심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봉산리 향나무 앞에서 문화해설사가 관람객에게 해설을 하고 있다.

‘봉산리 뚝향나무’가 지금처럼 잘 보전 될 수 있었던 것은 강화 최씨 집안의 가풍인 효심 때문이다. 조상의 은덕이나 부모를 향한 효심이 깊어 선조가 심어 놓은 정원수를 부모처럼 정성스레 돌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뚝향나무 특성상 스스로 이런 모양의 수형을 가질 수 없다. 

줄기와 가지가 일정정도 자라면 수평으로 가는 특성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으면 흉한 몰골이 된다. 효자 나무라는 말은 부모를 대하듯 정원수인 뚝향나무를 정성스럽게 보살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봉산리 뚝향나무는 효자나무이면서 사람의 정성이 만든 또 하나의 자연도 되는 것이다.

비록 세종시의 시목(市木)이 향나무에서 소나무로 바뀌었지만 봉산리 뚝향나무를 보전하고 돌보았던 강화 최씨 문중의 전통은 계속 전승되었으면 좋겠다. 강화 최씨 문중이 깊은 효심과 동

급으로 정원수인 뚝향나무를 보살피고 정성을 다하여 수려한 자태를 보전하듯이 말이다. 세종시가 진정한 행복도시가 되려면 봉산리 강화 최씨 문중이 조상을 모시듯 뚝향나무를 돌본 것처럼 자연을 정성스럽게 대할 때 진일보 할 것이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공주대 환경과학과 졸업,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세종시 환경정책위원, 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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