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사들의 많은 업무 가운데 하나는 문집, 교지 등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육활동에 관한 책을 만드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국어 교사는 출판사의 기획자이자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 전문 출판 영역의 종사자가 아님에도 전문가의 흉내를 내야만 하는, 아마추어인 아이들의 글을 모아 펴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획자이자 편집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어 교사의 자존심 때문인지 좀 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아지기도 하고 여러 차례의 편집을 도맡아 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교사는 그저 아마추어 출판인의 역할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작은 경험이 있다.
2016년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는 녀석들 다섯이서 ‘오글오글’이라는 글쓰기동아리를 만들어서는 내게 지도를 부탁했다. 전에도 경험이 있는 인터넷출판을 제안했고 아이들은 꽤 적극적인 답변을 전해왔다. 평소 과제도 많고 활동도 워낙 많은 아이들이라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낼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실력을 인정할 만한 녀석들이 내 기대감을 부풀렸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 나는 뜻하지 않은 감동의 선물을 받아 들게 되었다.
아래 글은 아이들의 소설집에 쓴 머리말이다.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와 같은 머리글을 소개해본다.
처음이자 마지막 편집 회의를 시작하며 잠시 동안 자기성찰을 끝내고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고를 읽으면서 나이가 많고 가방끈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너희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어.” 진심이었다. 글 꽤나 쓴다고 벌써 시집을 낸 녀석, 철학이라면 도무지 따를 자가 없는 녀석, 공부라면 반박의 여지가 없는 녀석, 예리하기로는 카터 칼 뺨치는 녀석, 여리지만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녀석. 다섯이 모여 책을 쓴다고 나를 찾았을 때, 뭔가 제대로 된 것이 나오리라 기대하긴 했었다. 신입생 수업을 하다가 발견한 걸출한 녀석을 이들 모임에 찔러 넣은 것도 사실 소설집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기대, 고대했건만 긴 여름이 지나도록 도무지 초안은 도착할 줄 몰랐다. 공부하느라 책은커녕 보고서 수준도 못 미치는 원고를 받아보는 건 아닌가하는 의심과 되풀이 되는 확인 끝에 어느덧 초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쌓인 업무와 수업, 집안일에 원고 파일을 묵혀두고 있었다. 초안을 인쇄한 A4 끝자락이 휘휘 말려들어갈 무렵, 언론사 송년 모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초안을 읽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원고를 읽기 시작한 나는 퇴고를 하다가도 스토리에 꽂혀 이내 신인 소설가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가 되어버렸다. 매 작품마다 거의 두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흐름이 좋지 않은 문장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괜찮은지, 다시 괜찮은지 곱씹어 보았다. 마치 내가 쓴 소설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검토를 마친 26일 새벽, 책상 귀퉁이에 놓인 막내의 어항이 눈에 들어 왔다. 플라스틱 음료수 뚜껑이 달린 구형의 투명 플라스틱 통. 희뿌연 액체(아마 물인 것 같다) 속에 들어 있는 말랑해 보이는 파스텔 톤 실리콘 구슬 여러 개. 막내는 이걸 어항이라고 부른다. 어항을 사알짝 흔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 부딪고 밀어 내듯 통통 튀어 오르는 구슬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반투명한 실리콘 구슬들이 빚어내는 희뿌연 세계.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같기도 한 어항 속 풍경이 오글오글 자체였다. 이 아이들이 뱉어내는 사색적이고, 실험적이고, 현실적이고, 때로는 저돌적인 생각이 상상력과 뭉쳐 만들어 낸 희뿌연 오묘한 세계. 오글오글의 첫 소설집은 어항 속에 갇힌 미지의 구슬 같았다. 얼른 냇가로 가져가 방생하고 싶다. 흐르는 물살이 두려워 냇가 바닥에 웅크리고 숨죽이게 될 수도 있고, 꿈틀거리는 새로운 생명체가 튀어 나와 냇가를 활보할 수도 있다. 영원히 구슬인 채로 냇가를 이리저리 누비고 다닐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 오글오글 작가들의 몫일 테지만 이들이 김훈, 김애란, 황정은 작가와 같은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작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소소한 생각들에서부터 사회구조의 모순까지 들먹이는 살아 있는 글을 쓰는, 쓸 줄 아는 지성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문학과의 우정을 죽는 날까지 이어가기 바란다. 이제는 누구나 아는 수상소감의 일부처럼 아이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심정으로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여전히 나는 부끄럽다. 하지만, 내년에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글쓰기를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출판 작업을 계속하며 나의 부끄러움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다. 2016년 12월 26일 동틀 무렵, 오글오글 지도교사 정 은 진 |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서는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과정을 삶의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한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희망과 절망을 씨줄과 날줄 삼아 정갈한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붙이고 떼고 하면서 튼튼한 문단을 구성하고, 또 문단을 쌓아서 한 편의 글을 축조(築造)하고, 나아가 한 권의 책을 엮기 위해 바지런히 노를 젓는다고.
아이들이 축조한 글, 조각조각 엮어낸 소설집은 아마 자신만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었을 게다. 꼭 하나의 소설이 아닐지라도 짧은 글을 하나 완성해내고 완성한 글을 엮어 만드는 문집을 제작하는 일 또한 그들만의 바다를 건너는 일일 것이다.
나는 올해도 고3 미디어 동아리 문집을 제작한다. 곧 원고의 머리말을 쓰게 될 것이며, 워드프로세서의 스크롤을 위아래로 젖혀가며 오타를 찾고, 문단을 수정하고, 맞춤법을 고치느라 시뻘건 눈을 치켜뜬 편집자가 되어 밤을 지새울 것이다. 삶의 바다를 건너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등대가 되어줄 수 있도록.
감동적인 소설집이 아니라 서툴고 모자란 짧은 글이 묶인 중학생의 학급 문집일지라도 나는 앞으로 아이들의 책 만들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엮는 경험을 돕는 아마추어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