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 내려오는 괴화산, 산신제 유명
KDI 내려오는 괴화산, 산신제 유명
  • 임영수
  • 승인 2012.11.0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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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석삼리...고인돌을 연상케하는 지명

   석삼 1리 마을 회관
석삼리는 백제시대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오랫동안 선비들이 많이 머무르다 간 곳이라 전한다. 마을 어귀에 돌장승이 있어 돌삼골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삼리(石三里)라 하고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재영 : 석삼리에 커다란 돌이 세 개 있었다고 하는데 아빠는 보셨나요?

아빠 : 아빠가 이곳 마을에 처음 왔던 것이 중학교 다닐 때인데 그때는 관심 없이 보아서인지 못 본 것 같아. 마을어른들의 말씀으로는 마을 입구에 크고 작은 돌이 세 개 있어 이곳을 ‘돌삼골’ 즉 석삼리라 하였다고 하지. 또 돌장승제도 매년 지냈었고.

재영 : 마을 가운데에 있는 버드나무가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아빠 : 약150년 전에 한산에서 이곳으로 이사 오신 분이 나무를 심었는데 여러 그루를 심었었어. 다른 것들은 모두 베어 배 만드는데 쓰이고 이것 한 그루만 남았다고 하거든. 이곳 마을 앞에 있는 금강은 군산, 논산, 강경에서 올라 온 새우젓, 소금 배가 많았는데 그때 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해.

재영 : 또 마을을 소개할 것이 무엇이지요?

아빠 : 마을 뒤에 집채 바위가 있어. 커다란 바위에 갓을 씌운 것처럼 되어 있는데 나무꾼들이 나무하러 갔다가 비가 오면 그 밑에서 비를 피했다고 하지. 6․25사변 때에도 이 바위로 피난한 이도 있는데 바위가 집처럼 커다랗다고 해서 집채바위라 부르지.

   석삼리 마을 비
재영 : 마을 뒤에 있는 산 이름이 뭐예요?

아빠 : 괴화산이라 부르고 있어.

재영 : 괴화산이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아빠 : 괴화산을 반곡리에서는 고야산이라고도 부르거든. 산아래 마을이 석교리, 봉기리, 반곡리, 석삼리, 장재리인데 이들 마을에는 고인돌이 많이 있단다. 고인돌은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로 죽은 자를 장사지낼 때 시신을 넣고 커다란 돌로 덮개돌은 덮었던 것이지. 그런데 연기군에는 금강이 흘러 고인돌이 곳곳에 많이 산재하여 있단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괴화산 아래인데 지명 또한 고인돌과 비슷한 이름이 많이 있지. 즉 괴화산도 고야산이라 부르는 것이 고인산 즉 고인돌 산이라 부르다 변한 것이지. 석교리를 돌다리라 부르는데 돌다리 역시 돌에 다리가 달렸으니 고인돌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곳 석삼리도 돌이 세 개라는 뜻도 있지만 고인돌은 양쪽 고인돌과 커다란 덮개돌로 이루어져 있으니 석삼이란 지명도 고인돌과 통하는 지명이지. 그런데 이 괴화산에는 더욱 유명한 것이 있단다.

재영 : 그것이 무엇인데요?

아빠 : 바로 괴화산 산신제인데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산제로서 산 아래 마을마다 한날 동시에 산제를 올리는데 그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내고 있어.

재영 :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아빠 : 괴화산 아래에는 여섯 개 마을이 있단다. 동쪽으로 석교리(돌다리), 서쪽이 석삼리인 안골(석삼1리)과 돌삼골(석삼2리), 남쪽에 길재, 북쪽에 반곡리이지. 이 중 지금도 산제를 지내는 곳이 석교리, 반곡리, 석삼1․2구 네 곳이고, 길재는 지내고 있지 않아. 이웃인 봉기리는 마을 뒷산에 산재당이 있는데, 1993년부터 산에서 지내는 것을 중단하고 마을회관에서 약식으로 지내고 있지.

괴화산 산신제는 아주 먼 옛날 이곳 괴화산에서 큰 싸움이 있은 후부터 전해지는데 마을주민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강 건너 전월산에는 아군이 주둔하여 싸움을 하였는데 괴화산에서 사는 짐승들이 왜군의 무기인 화살 등을 모두 갉아먹어 못쓰게 만들자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였어. 그러나 임진왜란 기록을 찾아보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없어 임진왜란 전투기록 중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동면의 동진뜰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나와 있지. 이곳에서의 전투 내용은 다른 시대 전투인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 시대가 변한 것 같아.

   석삼리 마을 뒤산 묘역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고려 충렬왕17년 몽고 합단적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내란을 일으켰는데 실패하여 고려에 침입하였어. 당시 왕인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고려는 큰 혼란에 빠지었어. 합단적은 남으로 남으로 진격하여 공주를 점령할 목적으로 내려오다 연기 정좌산에 머무를 때 고려의 삼장군인 한희유, 김흔, 인후가 무찌르니 이를 연기대첩이라 부르지.

재영 : 지난 진의리 원수산 이야기에서 말씀하셨지요. 그때 죽은 시체가 공주 금강까지 30여리 널려 있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하셨어요.

아빠 : 그래. 기억을 하는 구나.
그런데 그 때 살아남은 합단적이 금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정비하여 금강을 건너오려고 하니 이미 금강물이 불어서 건너올 수 없게 되었지. 그래서 금강 상류로 올라오다 보니 괴화산까지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 강을 건너 원수산에서 싸움을 벌인 것이 연기대첩 2차 전투인데 이 싸움에서 합단적은 더 이상 고려와의 싸움을 할 수 없게 패배하고 말았지. 그런데 이곳 마을사람들은 그때 괴화산에 사는 짐승들이 합단적의 무기를 못 쓰게 만들어서 승리했다고 믿은 것이야.

재영 : 괴화산 짐승들이 큰일을 도와주었네요.

아빠 : 그래. 그래서 산 아래 주민들은 괴화산의 짐승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산에 올라 제를 지낸 것이 괴화산 산제의 시작이 된 것이야.

재영 : 그러면 괴화산의 산제는 700여년 됐다는 것이네요?

   석삼1구 석물

아빠 : 그 정도 됐지. 꽤 오래 전부터 시작이 되었어.
산제는 음력 10월 1일 날 지내고 있어. 산제를 지내기 사나흘 전에 동네사람이 모여 제관을 선출하지. 제관은 생기(生氣)와 복덕(福德)한 사람을 뽑는데, 뽑힌 사람은 제주인 공양주와 축관을 선임하지. 선출된 사람들은 제 지낼 때까지 밖의 출입을 되도록 삼가하길 바라지.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 흙을 여섯 군데 부어 놓는데, 황토 흙은 나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야. 즉 붉은색은 귀신이 가장 싫어하는 색이거든.

이 집은 산제 지내는 제관이 계신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금줄은 제관집 앞뿐만 아니라 마을 어귀에도 설치하는데 예전에는 마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는 제가 끝나는 날까지 못나가고 이곳에서 제를 지낸 후에 나갔다고 했어. 즉 새우젓 장사나 보따리 장사들이 이곳 마을에서 산제지내는 것을 모르고 물건 팔러 들어왔다가 산제 지낼 때까지 못나가게 되는 것이지.  그만큼 신성하게 한 것이 산제란다.

재영 : 동네사람 모두가 깨끗한 마음으로 산제를 준비했나 봐요.

아빠 : 그래. 산제는 정성이 첫째란다.
산제를 잘못지내면 1년 내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니 잘 지낼 수밖에 없지. 관은 산제당에 있는 우물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 물을 떠서 목욕을 하는데 아무리 추어도 춥다는 내색을 하지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이지. 물은 삼색실과(三色實果 - 적, 황, 백 赤黃白 밤, 대추, 감)을 쓰며 돼지 한 마리를 잡지 돼지는 수퇘지로 교미를 하지 않은 것으로 준비를 하고 그것을 잡아서 털을 깨끗하게 뽑고 내장을 꺼내 깨끗이 한 다음 통째로 갖다 놓고 제를 지내지. 를 지내는 날 어둑해지면 축관과 공양주는 제물을 지게에 지고 산에 오르지. 물을 지고 오를 때 절대로 중간에 쉬어서도 안 되고 잡담을 해서도 안 되지. 마을사람들은 떡을 해서 장독대에 놓고 촛불을 켜 놓지. 산제당에 오른 제관은 제물을 차려놓고 세수를 한 다음 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지.

먼저 술을 붓고 여덟 번 절(팔방배례, 八方拜禮)을 한 다음 소지(燒紙)를 올려. 소지는 한집 당 한 장씩 올려주는데 세대주 이름을 부르면서 그 집이 잘되기를 빌어줘. 이렇게 소지를 올리고 소지가 끝나면 절을 두 번한 다음 축관이 축을 읽지, 축을 읽고 절을 두 번 한 다음 산제당 안에서 축관과 공양주가 날을 세워. 이때 두 사람의 대화는 절대로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안돼. 반드시 농사에 관한 이야기만 해야 해. 새벽 첫 닭이 울면 동네 이장이 산제당에 올라 제가 끝났음을 알리지. 축관과 공양주는 세수를 한 다음 두 번 절을 하고 음식을 지게에 지고 내려와. 축관과 공양주는 이장댁에서 제물로 썼던 음식으로 술을 한잔 마시며 수고했다는 말과 이야기를 나누지. 제물로 썼던 돼지는 수고한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동네사람들에게 싸게 팔아서 기금으로 적립하고 있어.

   석삼 1구 석물

재영 : 그렇게 엄하게 지내는 제사가 동네사람이 잘못하여 벌을 받은 적도 있나요?

아빠 : 여러 가지 사례가 있어.
석교리 산제당에 제를 지내기 위하여 돼지를 짊어지고 오르다 푸념 섞인 말을 했어. 그러자 그 사람이 자고 일어나니 입이 옆으로 돌아가 말을 못하였어.  어느날 산제당 옆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사람이 다음날부터 눈이 보이지 않아 소경이 되었다는 말이 있어. 곡리에서는 산제당에 제를 지내기 위하여 제관으로 뽑힌 분이 산제당에 청소를 하려고 산에 오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곳까지 따라오는 것이었어.

개 주인은 개에게 화를 내면서 가라할 수 없어서 좋은 말로 타이르면서 산제지내는 곳에는 짐승이 와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자 개가 알아들었는지 마을로 내려갔어. 그런데 그날부터 그 개를 본 사람이 없어.  산제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제관은 삼일 간 목욕제계를 한 다음 산제를 정성껏 지내고 마을로 내려오자 그제야 개가 마을입구로 돌아왔어. 개를 보니 삼일 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 굶은 표정이었어.

재영 : 참 신기하네요. 그 개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으며 산제의 중요성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빠 : 그래. 때때로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하지. 이곳 마을에서는 산제의 중요성을 동물들까지 알 정도이니 산제가 이렇게 중요한거야. 제를 올리는 동네는 왠지 평온하게 느껴진단다. 을 주민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지. 한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돕고 의지하며 마을 공동사업에 모두 참여하며 웃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산제를 지내다 중단한 마을은 불화가 일어나서 산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마을표지석

이 지역에 전해오는 마을제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길을 넓히고 미신타파를 부르짖은 것이 1970년대이지. 그때 대부분 마을제 즉 산제, 탑제, 장승제, 거리제 같은 것이 사라진 거야. 처럼 그러한 시대를 넘어 마을사람들이 꼭 지켜야 한다며 사라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마을들도 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아.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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