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한국인 여성1호 미용명장 비법은
기능한국인 여성1호 미용명장 비법은
  • 조병무
  • 승인 2012.10.26 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병무의 e-노트]대한민국 명장 이온숙 원장의 비법 전수이야기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이온숙 명장
나이를 묻지 마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열정, 매너, 도전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명장이니 이제 뒷전에서 쉬면서 훈수를 두는 것이 더 어울릴 만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생 100세 시대에 난 아직도 멀었다며 기본기 하나하나 지도하는 모습은 저절로 존경을 표하게 한다. 명예와 부 어쩌면 모두 얻은 그런 풍족함에도 전혀 내색함이 없이 겸손과 배려로 주변을 가꾸니 더욱 머리가 숙여진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05(구 : 암사동 504-24)에 지하1층 지상 3층의 자가 건물에 마에스트로 미용예술전문학교와 명문 미용전문학원, World Hairshow 미용실을 운영하며 후배양성과 어려운 점포를 위해 비법을 전수하고 있는 기능한국인 여성1호이며 대한민국 미용부문 명장인 이온숙(李溫淑)원장을 찾아가본다.

비법전수에 열심인 까닭은?

우리나라 미용사 1호인 고 오엽주 선생의 수제자 이온숙 여사. 그는 지금도 1954년 6월 ‘대한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 졸업식 때 오 선생님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부모처럼 돌봐주고 가르쳐준 진정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닮으려고 노력 합니다. 제가 후학을 가르치는 것에 남다른 열정은 모두가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숙제를 푸는 일입니다. 졸업식 때 ‘자네는 미용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라’는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최고의 미용사가 아닌 최고의 교육자가 되기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려운 미용실 점주들에게 비법 전수에 열심인 까닭은 바로 선생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작품 옆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가의 꿈이 미용사로

중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평북이 고향인 저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피난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대한군경원호학교’ 미용과에 입학을 합니다. 학교가 국립인 덕에 모두가 장학생으로 미용기술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려서의 꿈은 화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제 솜씨는 남달라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학교 교실이며 복도에는 늘 제 그림이 걸려 있곤 했지요. 아마도 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 하여 화가로 대성(?)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화가에 대한 미련은 마음구석에 남아있지요. 2층 응접실 벽면엔 지금도 틈만 나면 그린 수준급의 유화작품이 이 명장의 말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감각이 결국 오엽주 선생의 눈에 띄게 되고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과 함께 오 선생님의 가게에서 일하는 행운도 얻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美’자는 어쩔 수 없는 저의 운명인가 봅니다. 그저 ‘미’자가 좋아 미용과를 지망했는데 헤어도 예술로 승화되었으니 참으로 세상은 알 수 없지요. 

오엽주 선생의 수제자가 되다

1954년 오엽주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충무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 미용실을 개원하였다. 선생님은 많은 제자들 중에서 이온숙 여사만 데리고 가셨다. 아마도 졸업식에서 대통령상(이승만)을 수상한 실력을 인정하신 것 같다. 당시 대단한 실력의 선배들과 함께 오엽주 선생님의 미용실에서 실전을 닦는다. 그 당시 ‘오엽주 미용실’엔 유명 인사들이 애용하던 곳으로 영화배우 엄앵란, 전숙희 문인 등 많은 주요 인사들이 단골이었다. 4년 동안 선생님과 선배들 밑에서 체계적으로 실력을 쌓아갔다.

   대한민국 명장임을 알려주는 각종 패

드디어 사장이 되다

드디어 1958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현대 미용실이라는 상호로 개원을 한다. 나도 사장이 된 것이다. 가슴이 벅찬 하루하루였다. 간절히 바라던 첫 사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안 되어 ‘미스 장’이라는 미용사가 실수로 초등학교 여학생의 귀를 베는 실수를 범한다. 작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의 엄마는 난리다. 학생을 데리고 큰 병원을 찾아다니며 안심을 시켜 가족의 난동을 막았다. 대형 사고다. 자칫하면 바로 문을 닫을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사업은 예기치 않은 위험을 감내할 줄 알아야한다. 대부분 남의 일은 쉽게 되고 내일은 어렵게 되는 줄 아는데 성공의 뒤안길에는 말 못할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5년간의 후암동 생활을 마치고 용답동으로 옮긴다.

웨딩시대의 도래로 정말 명문이 된 ‘명문미용실’

이후 80년대가 들어서면서 ‘웨딩예술’의 시대가 도래 하는데 이때부터 인생이 달라진다. 이는 1980년 성동구 용답동에 있는 명문예식장내에 ‘명문미용실’을 개원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하루 60여명의 신부가 몰려드는 호황을 누린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 이어진다. 그래도 보조자 몇 명을 두고 거의 혼자 처리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여 유명세를 탄다. 설과 추석을 빼고는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이 열심히 일했다. 유명해진 미용실 덕에 예식장도 잘되는 호황의 나날이었다. 18년 동안의 명문 미용실은 경제를 풍요롭게 한다.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풀다

여유로운 경제력은 새로운 꿈을 가능케 한다. 후학양성을 위한 학원 설립을 시작한다. 1988년 드디어 암사동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을 매입하고 명문직업전문학교를 설립한다. “자네는 미용을 교육하는 교육자가 되시게 ------.” 란 말씀을 주신 오엽주 선생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서다.

사실 미용업계가 처음부터 사회로부터 존경받던 직종은 아니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미용인들은 시집가기도 힘들 정도로 사회인식이 좋지 않았다. 기술을 홀대하던 사회분위기도 문제지만 미용인 스스로의 자기관리에 문제가 함께 내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미용풍토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호칭에서부터 일하는 자세, 고객에 대한 에티켓 등등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냈다. 기술 이전에 인성을 가르쳤고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문화예술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갖추는데 노력했다. 이 원장께서 특별히 당부하는 것은 손님한테 들은 애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영업에서 터득한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스승 오엽주 선생님

남은여생은 사회공헌으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전 행운아입니다. 국가의 지원으로 기숙사에서 전액 무료로 미용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에 이르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1997년 IMF이후 고용노동부에서 실시하는 실업자와 저 소득자를 위한 ‘재취업’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았습니다. 어릴 때 제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이 곧 사회에서 진 빚을 갚는 길 중하나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실업자라고 부끄럽게 생각하지마라.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하라. 나는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아 이렇게 성장했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나의 극성스런 독려에 97%의 자격취득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소기업청과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시행하는 소상공인창업학교에도 관심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그동안 쌓은 경영노하우를 직접 전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1976년부터 미용인 봉사단장으로 독거노인, 불우이웃, 군부대 방문 등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아 봉사를 해오고 있다.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 비롯한 수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음은 가히 그 공로에 사족이 필요 없다. 남은여생의 사회공헌은 늘 ING라는 이 명장의 말에 온기가 가득하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

눈물 젖은 빵으로 배운 기술. 잠시도 쉰 적이 없다. 1986년 국내최초로 짧은 머리(3㎝ 정도)로도 올림머리(UP-style)가 가능하도록 하는 미용기술을 개발하여 업계로부터 한국미용기술의 새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발간한 이온숙 노블리스 업스타일(LEE ON SOOK NOBLESSE UP-STYLE)은 아직도 미용업계의 교과서로 쓰는 역작 중 하나다. 1998년 세계미용대회(헤어월드 챔피언십)유치를 비록 각종 대회의 심사위원 활동 등 한국미용의 선진화와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는 업계 종사자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2003년 고용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에 오르고 2007년 기능 한국인으로 선정됨은 그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이가고 남는다. 1남 3녀를 둔 이 여사는 자녀 모두를 미용업계에 진출시켰다. 큰 아들은 서울 성동구에서 황태자 미용실을, 국희는 미국워싱턴에서 마샬 헤어숍을, 그리고 혜란과 혜라씨는 엄마를 도와 학원(3곳)일을 돕고 있다. 100% 가업승계다. 놀라운 일 중 하나가 아닌가?

장시간 인터뷰 하면서 확실하게 정리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한순간도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1년 365일 쉬지 않고 살았다. 오늘의 나는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피눈물 나는 노력과 집념이다. 무엇이든 목표를 정하면 꼭 이루고야 마는 신념으로 살았다. 네 자의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친절하다, 겸손하다, 반듯하다, 허튼 곳이 전혀 없다, 옆에서 거들던 자녀들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스토리가 저절로 존경을 표하게 한다. 지나친 풍요에 갈 곳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이 명장의 인생은 ‘새로운 백신’이라고 말하는 류철규 명장(인장분야, 대한민국 명장협회 대전지부장). 기술보다 인성이 앞서야 된다고 그리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말씀에 공감한다며 그래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서각을 직접 새겨 선물했다고 한다. 친화력이 강한 이 명장의 주변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모인다. 그래서 그는 참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온숙 명장! 미용뿐만 아니라 인생도 명장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명장전 발표회를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온숙 명장
대한민국 미용부문 명장 (03-1호), 기능한국인 09호(여성 1호), 서울특별시 표창 (1965, 1987, 2002), 보건사회부장관 표창(1987, 1991, 1994, 2000), 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 (2001), 저서 : 이온숙 노블레스 업스타일(2003.4.25, 일산 P&P), 마에스트로 미용예술직업전문학교, 명문 미용전문학교, World Hairshow 미용실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805 (구 : 암사동 504-24)
02-2291-0096, 02-429-4492
네이버카페 : http://cafe.naver.com/mmbeauty
홈페이지 : http:/mmbeauty.co.kr

 
     
 
 

조병무, 경영학 박사, 경영지도사, 소상공인 진흥원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대전상의 경영자문위원, 대전충남사회성향상 교육위원회장, 한남대 겸임교수, 저서 : 허리를 굽혀야 돈을 줍는다. 돈버는 길목은 따로 있다. 이메일: dr1133@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