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는 함께 할 때 시작된다"
"작은 용기는 함께 할 때 시작된다"
  • 박윤선
  • 승인 2016.12.14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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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양지고 박윤선 교사, "양지고 수업 연구회.. 함께 만들어가는 수업"

 
   양지고 박윤선 교사
아침 알람은 꼭 3번이 울리고 나서야 꺼지곤 한다. 시작되지 않았으면 하는 아침이 결국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출근이 두렵다.

여기저기 무리지어 등교하는 아이들 사이를 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황급히 지나간다. 나의 등장이 아이들에게 반가움일까, 아니면 억지로 인사해야 하는 부담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긴장된 몸은 더욱 움츠러든다. 곧 마주하게 될 고통에 대한 마취제인 듯, 커피 한 잔으로 그렇게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오늘은 무기력한 3반 아이들과 모둠 수업을 시도한 날이다.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배운 「태평천하」를 가지고 모둠 활동을 할 거예요. 모둠 대형으로 앉아봅시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연체 생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책상을 옮기는 아이들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다. 오늘 준비한 수업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이 생긴다. ‘이 방법이 맞는 걸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태연한 표정으로 지난 시간에 배운 「태평천하」를 다시 정리하고 모둠 활동을 시작한다. 오늘 모둠 활동은 토론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매정한 수전노이자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친일파 ‘윤직원’을 재판하자는 것이다.

‘윤직원은 악인인가?’

칠판에 쓴 토론 주제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분명 악인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는데, 선생님의 의도가 무엇일지 한참 생각하는 눈치다. 토론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를 켜고, 윤직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텍스트를 바탕으로 정리해보라고 언급한다. 아이들은 「태평천하」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과연 윤직원은 악인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침묵 속에 아이들은 책을 읽고 있다. 모둠 수업이 실패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한다. 2분 정도가 지나자 아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근거가 될 만한 윤직원의 행동과 대사를 하나하나 언급하기 시작한다. 마치 카드놀이를 하듯 텍스트에 밑줄 친 자신의 패를 번갈아가며 교환하기 시작한다. 옆 모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흘려듣지 않고 메모한다. 그동안 무기력한 반이라고 매도(?)해온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이들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수업 시간 중 아이들의 다양한 활동 모습
그러다 갑자기 논의의 방향이 다른 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윤직원의 행동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아이들은 자신이 읽은 「감자」, 「범죄의 심리학」 등의 책을 인용하며, 개인의 행동이 개인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인지 토론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 책상위에 다양한 색으로 밑줄 쳐진 교과서, 그리고 아이들의 토론을 받아 적는 나의 바쁜 손. 토론 수업은 예상 밖의 대성공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나는 정말 교사가 될 만한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우리 학교 아이들은 참 복도 많군.’ 약간의 허영심에도 젖어보며 그동안 쌓인 모든 고통과 상처들을 위로 받는 기분을 느낀다.

교사는 수업을 통해 행복하고, 수업을 통해 의미를 부여 받으며, 수업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5월에 용기 내어 시작한 수업의 변화는, 그 자극적이고 포기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업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격려하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양지고등학교에는 T.I.E.(Teaching Idea Exchange)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교사 연구회 모임이 있다. 순수하게 수업에 관심이 많은 교사들이 모여 수업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과 감정들을 나누는 모임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교내 일과를 고려할 때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온라인 밴드를 개설하고, 수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일기 형식으로 적기 시작했다.

교실 안에서 느껴지는 즐거움, 기쁨, 부끄러움, 분노 등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공개하면 공개 할수록 우리 안의 어떤 에너지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꽉 닫힌 교실 안에서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감정들을, 같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꽁꽁 닫혀 있던 내면이 열리고 정화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수업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국어’ 과목과 ‘한문’ 과목이 함께 융합 수업을 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마침 내가 가르치는 문학 수업의 다음 진도가 박지원의 한문학 작품인 「통곡할 만한 자리」였다. 한문 선생님과 공강 시간마다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며, 우리는 ‘문학-한문 융합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수업을 하게 되었다.

「통곡할 만한 자리」는 7정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박지원의 통찰이 담겨 있는 글이다. 문학 시간에는 이 내용을 감상하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인간이 갖는 7가지 감정 중 자신에게 억눌려 있거나 과하게 표현되는 감정이 있다면 써 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왜 즐거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즐겁게 느끼지 못하는지, 누군가를 미워할 때에는 어떤 정당함이 필요하며 혹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왜 죄책감이 느껴지는지, 왜 슬퍼도 슬픔을 표현할 수 없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적었다.

   수업에 대한 수업 성찰 일기와 댓글들
이 활동을 바탕으로 한문 시간에는 한문을 강독하고, 문학 시간에 쓴 자신의 이야기를 한문으로 적은 한문 엽서를 제작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은 각각 문학 시간과 한문 시간에 과정 평가로 누가 기록되어 수행평가 점수로 입력했다. 우리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늘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수행평가 때문에 공부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두 과목이 융합하여 교과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그 과정을 수행평가로 연결하여 두 과목의 평가를 하나의 활동으로 해낼 수 있도록 한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꼭 맞았다는 것이 우리 연구회의 자체 평가였다. 그리고 한문 선생님과 나는 한동안 셀프 칭찬과 보람 섞인 허영심에 젖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수업이 늘 기다려지고 매번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아직도 아침이 더디 오길 기다리고, 교단에 서는 것이 두렵다. 성적 때문에 상담 오는 아이들에게 이번 시험에서 전체 1등급을 맞을 것을 응원하지만, 1등급은 전교에 3명만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로 인해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하지만 삶의 다양한 모순 가운데서, 함께 떠들고 웃고 푸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말싸움이나 하고 보고서에 실적을 내기위해 가끔 아이들을 이용하기도 하는 부끄러운 선생이지만, 이렇게 지극히 유약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이해받고 긍정 받는 일은 아름다운 용기를 불러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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