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모랭이, 모롱고지가 있는 마을
동천모랭이, 모롱고지가 있는 마을
  • 임영수
  • 승인 2012.10.1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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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송원리...원터는 금호서원의 옛터 이름

   만자동과 정려각
열번째날 - 송원리(松院里)

송원리는 백제시대 웅주(熊州)에 속했으며 고려 성종2년(983년)부터는 공주목(公州牧)의 관할이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장원면(長元面)의 지역으로서 이곳에는 산과 계곡에 소나무가 많았고 서원(書院)과 기와집이 즐비하게 많아서 송원리(松院里)라 하였다. 본래 공주군 장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행리, 신촌, 원촌, 죽동, 송계리, 만자리, 원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계와 원촌의 이름을 따서 송원리라 하여 장기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재영 : 송원리는 공주와의 경계지역이어서 그런지 멀게 느껴져요.

아빠 : 조선시대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날 때 서원과 기와집이 많은 것을 보고 여기가 한양이냐고 물을 정도로 기와집이 많은 동네였는데, 신작로가 종촌쪽으로 나면서 이곳으로 왕래가 없게 되자 오지의 마을로 전락하게 되었지.

우선 마을의 지명부터 알아볼까.

재영 : 예. 송원리에도 재미있는 지명이 많을 것 같아요.

아빠 : 송원리는 1리인 송계동, 곡촌, 원터, 대소골, 만자골 등이 대표마을이고, 2리에는 원호, 산적말, 참샘골이 대표마을이지.

우선 1리의 지명부터 알아볼까.
‘송계동(松溪洞)’은 원촌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약3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지. 나성에서 송원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서낭댕이’라고 부르는데 도로가 나기 전에 산 고개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었어. 또 나성과 송계동의 경계에 있는 돌벌벽을 ‘돌쇠부리’라고 하는데 금강가에 있는 이곳은 수심이 깊고 물이 이곳에서 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만자동

재영 : 돌쇠부리는 위험한 곳 같이 느껴져요.

아빠 : 낚시꾼들과 이곳으로 철엽을 온 사람들이 종종 이곳에서 빠져죽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어. 이곳을 ‘돌쇠풀’이라고도 부르는데 경치는 아름답지만 상류에서 내려오는 금강물이 이곳 바위와 부딪치면서 물이 돌아 위험한 곳이지.

송계동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곡촌(谷村)’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수령이 4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나무가 오래되어 속이 텅 비자 고사(枯死) 직전까지 갔는데 동네사람들이 연기군에 건의하여 조치를 취하여 살려냈어. 예전에는 이 나무에서 목신제(木神祭)를 지냈으나 어느 해부터 지내지 않다가 2001년부터 다시 지내기 시작하였어. 제는 정월보름날 낮에 동네사람 모두가 나와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차려 놓고 동계장, 마을이장, 청년회장 순으로 술을 따르고 절을 하지.

마을 주면에는 홍두깨처럼 곧고 길어서 ‘홍두깨골’이라 부르고, 말을 파묻었다 하여 ‘말무덤’, 홍수가 나면 배를 묶어 두었던 곳을 ‘배맥이골’, 예전에는 마을이 없었고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는 뜻으로 ‘새뜸’이라 부르는데 호구혈(戶口穴)의 명당이 잇는 곳이지. 이 명당은 자손이 찾아오면 화를 입기 때문에 묘지기를 두어 관리하였는데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묘지기가 땅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는 말도 있어.

재영 : 자손이 찾지 못하는 곳을 명당이라 할 수 있나요?

아빠 : 글쎄. 그 곳이 명당이라면 묘지기가 땅을 팔고 이사를 갔을까.
지명을 더 소개하여줄까.

재영 : 예.

아빠 : 마을로 갈 때 새터로 돌아간다고 하여 ‘동천모랭이’ 혹은 ‘모롱고지’라고 붙여진 이름이 있고, 강 옆에 모래 백사장을 들판으로 만든 곳을 ‘백사장들’이라 부르지. 현재 동성피혁 회사가 자리 잡고 있어.

송원1리 3반을 ‘원터’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금호서원(錦湖書院) 옛 터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새터’, ‘원촌(院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기와집이 많았었나 보지. 원터 앞에는 열녀비가 1기 있었는데 일개 열녀비(一介 烈女碑)야. 도로공사를 하면서 묻으려고 하는 것을 우리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어.

재영 : 박물관에 있는 일개 열녀비가 이곳에 있던 것이었네요.

아빠 : 일개는 성씨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사대부집 아녀자가 아니라 낮은 신분 즉 노비일 가능성이 크지. 그런데 열녀의 정려를 임금에게 받은 것을 보면 보통 열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당시 권세 있는 집안에서도 열녀정려를 받기가 그리 쉽지 않았거든.

재영 : 금호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원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머레
아빠 : 금호서사(錦湖書社)는 죽당(竹堂) 류진동(柳辰仝), 석담(石潭) 류형(柳珩), 금사(錦沙) 류충걸(柳忠傑)을 제향하기 위해 1827년(순조27년)에 건립되었던 서원이지. 1832년에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이 쓴 금호서원기에 의하면 정묘조에 특명으로 유씨 세가(世家) ‘존주록(尊周錄)’에 편입되자 금호의 선비들이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향선생이 죽으면 그 사례(社禮)를 지낸다. 우리 향리에 유씨의 집안과 같은 일문삼현(一門三賢)이 있으나 일찍이 숭봉(崇奉)의 예가 있지 않았으니 이것은 향선생과 같지 않은 것이다. 향리에 모현(慕賢)의 풍속이 있지 않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금호위에 사우를 세우고 삼현을 병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는 1783년(정조7년) 류취장이 평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796년 류형이 숭경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류지걸이 호조좌랑에 증직되었으며 충신의 명정을 받았지. 1799년에는 류진동이 정민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1802년에는 류취장이 무민공 시호를 받았으며 진주류씨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포장과 증직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류형의 아들 류충걸이 살던 곳에 정민공 류진동과 충경공 류형 그리고 류충걸을 제향하는 금호서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야.

1851년(철종2년) 공주유생 이계원(李繼遠) 등 37명이 올린 문서를 보면 죽당 류진도, 석담 류형, 금사 유충걸의 충절을 찬양하고 이미 해남과 함평에 사당을 지어 모시고 있으니 공주에도 사우건립을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어. 그러나 거듭된 요청에도 사액을 받지 못하다가 건립 40년 만인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당하는 운명을 맞았지. 금호서사 터는 송원1리 이영동씨 집이 있는 자리로 당시 서원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주춧돌, 기와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류충걸, 류비연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어.

   마을 회관

서원이 훼철된 후 아쉬움이 컸던 후손들은 류형 장군 관련 고문서와 유품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계기로 1971년 류형 장군을 모신 충렬사를 장기면 하봉리에 건립하기에 이르렀어.

재영 : 금호서사에 배향되었던 인물에 대하여 소개하여주세요.

아빠 : 그래. 우선 류진동(柳辰仝, 1497~1561년)에 대하여 소개해볼까.
본관은 진주이고, 1522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제수되었어. 이후 예문관 검열을 거쳐서 승정원 주서가 되었는데, 스스로를 엄격히 지키고 권귀(權貴)에 아부하지 않아 탄핵되기도 하였어. 1537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43년(중종38년) 특명으로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소를 올려 소학(小學)의 금법(禁法)을 완화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소학에 대한 금령이 해제되었어. 이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년)이 그 소를 ‘일양소(一陽疏 - 어두운 가운데 하나의 밝은 상소)라고 칭찬하였어. 동부승지 좌승지를 엮임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홍문관의 장관이 되었고, 대사헌, 공조참판,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고 경기도관찰사, 평안도절도사가 되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때 경연(經筵)에서 주역(周易)을 진강하게 되어 주역에 밝은 자를 선발하게 됨으로써 다시 기용되었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559년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직하던 중 중풍을 얻어 사직을 청하니 왕이 공조판서를 바꾸고 지추밀원사로 임명하였어. 그러나 그는 “일을 하지 않는데 어찌 그 녹(祿)을 먹을 수 있는가” 하며 받기를 달가워 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 해 여름에 소를 올려 당시 정사가 어그러지고 어지러움을 힘껏 전달하다가 이량(李梁), 심통원(沈通源) 등의 미움을 받아서 한달이 넘도록 옥에 갇혔다가 정주(定州)로 귀향을 갔어. 이듬해인 1560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1561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지.
그는 성품이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였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어. 특히 죽화(竹畵)를 잘 그렸으며 남대문의 편액인 숭례문(崇禮門)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어. 1799년(정조23년) 정민(貞敏)의 시호를 받았지.

두 번째 배향인물 류형(柳珩, 1566~1615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던 중 강화도에 이르러 김천일(金千鎰) 장군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그 이듬해인 1593년 의주행재소에 가서 선전관에 임명되었어. 29세에 전주에서 실시된 무과 별시에 을과로 급제되어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지. 해남현감으로 재직하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통제사 이순신의 막료가 되어 수군 재건에 노력하였으며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으로 출전하여 왜군과 싸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어. 특히 광양만 근처에서 이순신과 진린 제독의 연합작전 중 그의 기지로 진린과 이순신을 곤경에서 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 1598년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 임진왜란의 막바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노량해전에서는 적탄을 맞고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어 냄으로써 혁혁한 공을 세웠어. 조정

   주민들 모습
에서는 그에게 부산진 첨절제사에 발탁하였으나 미처 부임하기 전에 경상좌수사에 임명되었고, 충청수사, 전라우수사를 거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어. 1607년 함경북병사로 임명되는 동시 왕으로부터 밀부(密符)를 받았지. 평안감사로 재직하던 1611년(광해군3년) 격무로 인한 중풍으로 쓰러지자 왕이 어의를 보내어 그를 치료하게 하였으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병이 깊어져 1612년 평안병사직을 사직하였어. 그러나 1613년 다시 평안병사에 재기용되어 많은 반대와 모함을 무릅쓰고 황주성 축성에 노력하였으며 1615년(광해군7년)에 임무를 수행하던 중 순직하였어. 그가 죽은 후 1618년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증직되었고 1620년에 선무원 종1등 공신으로 녹훈되어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었어.

세 번째 배향인물은 류충걸(柳忠傑, 1588~1665)로 1618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어. 당시 이이첨, 정인홍 등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자 그는 소장을 올려 대의(大義)를 박히려하자 어머니인 이씨부인이 붓을 꺾고 울면서 만류하였으므로 결국 올리지 못하였어. 또한 표친(表親)인 정조(鄭造)가 폐모론에 앞장을 섰으므로 그 집으로 찾아가서 정조의 좌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꾸짖은 후 공주 금강가에 은거하였어. 이때부터 류씨들이 송원리에서 살게 되었지. 인조반정 후 중림도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어. 얼마 후 흥경원 재랑(興慶園 齋郞)이 되었는데 일찍이 인조가 홍경원에 찾아와 전배(展拜)를 마치고 그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한 후 물품을 내리며 “너는 나의 포의(布衣)적 친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류충걸의 부인인 능성구씨(綾城具氏)가 인조의 외숙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 1558~1618)의 딸이었기 때문이지. 이후 경양도 찰방에 제수되었으며, 선정을 베풀어 역 사람들이 비를 세워서 추모하였으며 사재감 직장으로 승진되었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동으로 달려가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던 인조가 청에 항복하고 한양으로 환도하자 곧 궁궐 아래로 나아가 병란을 당하여 죽음으로써 적을 막지 못한 죄를 물어 처벌해 줄 것을 청하고 소장을 올려 힘을 기르고 치욕을 씻을 방책을 개진하였다. 그는 천성이 지략과 용기가 비범하고 불의에 항거하여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이었으나 항상 마음가짐이 어질고 깊어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이 없었으며 청렴하고 결백하였어. 당시 영의정 원두표(元斗杓, 1593~1664)는 류충걸이 벼슬에 있으면서 털끝만치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음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진정한 사대부이다.”라고 하였어.

재영 : 금호서사에 배향된 인물은 위급한 나라를 구한 훌륭한 무인들이시네요.
서원터 아래를 정문거리라 부르는데 옛날에 정문이 있었나요?

아빠 : 원터에 충신정려가 있었어. 광해군때 명나라의 명을 받고 출전하였다가 전사한 류지걸(柳智傑)의 충신정문이지. 자손들이 공주로 이사하면서 후에 공주시 의당면 송학리로 옮겼지.

송계 북쪽에 있는 마을을 ‘대소골’ 혹은 ‘대숲골’이라 부르는데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죽동(竹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지형이 소쿠리 안처럼 아늑하지.

‘망적봉(望積峰)’은 송원리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전란시에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대소골 북쪽 골짜기에 잇는 마을을 ‘만자골’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이곳에 암자가 있었어. 암자에서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마을이지. 많은 자식을 얻어 나가는 암자가 있다고 하여 ‘만자골’ 이라 부르고 ‘만자동(滿子洞)’이라고도 부른다고 해. 그런데 만자동에 관한 또 다른 유래가 있는데 예전에 이곳을 ‘복자동’이라 불렀다고 해. 효자 이정환이 복자동은 자손이 번창 못하는 이름이라 하여 복자를 만(萬)자로 고쳐서 만자동이라고 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유래인 것 같아.

만자골 남쪽 고랑을 ‘요골’이라 부르며 서북쪽 골짜기를 ‘새방골’이라 부르고 있어.

만자골의 남서쪽 마을로 해가 뜨면 음지인 쪽이 ‘음지말’, 반대로 북쪽의 마을은 ‘양지말’이라 부르고 있어.

재영 : 이곳에도 정문이 있네요.

아빠 : 이곳 만자동에 세워진 정려는 삼형제의 효자정려이지.
진주이씨 집안의 이정환(李廷煥, 1604~1671년)과 그의 손자인 이경설(李景卨, 1650~1708년), 이경익(李景益, 1655~1707년)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지.

이정환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한재(寒齋) 이목(李穆)의 5대 손으로 자는 휘원이고, 호는 송암(松岩)이야. 1633년(인조11년)에 생원이 되었으나 병자호란의 국치를 통분히 여겨 외출을 삼가고 비가(悲歌) 10수를 지었어. 효행 또한 남달라서 부모상을 당하자 6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으로 끼니를 이으니 그 소문이 퍼져 1666년(현종7년) 현종이 온천에 거동하던 도중에 이러한 효행사실을 듣고 특별히 백미를 보내어 표상하였어. 죽은 후 10년만인 1681년(숙종7년)에 어사의 계(啓)에 의하여 명정을 받았어. 1723년(경종3년)에 이세구가 행장(行狀)을 짓고 남구만이 묘표를 썼지.

이경설은 이정환의 장손이고 이경익은 이경설의 동생인데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가 함께 자라면서 형은 아우를 위하기를 내 몸 같이 하고 아우 또한 형의 말이라면 어버이 같이 받들어 섬기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해. 이경석이 18세, 이경익이 13세 되던 해에 뜻밖에 모친상을 당하자 산소 옆에 초막(草幕)을 짓고 형제가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는데 마치 살아계신 분을 모시는 듯 하였고,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며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3년간 시묘하니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쌍효자라 일컬었어. 물론 부친에게도 더욱 효도하였는데 비록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나 부친에게는 항상 하얀 쌀밥과 고기반찬으로 봉양을 하였으며 아무리 눈보라가 쳐도 부친의 온돌방에는 훈훈한 열기가 감돌게 하였어. 형제가 한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니 이러한 두 아들의 효성으로 부친은 75세까지 편안한 여생을 마치고 눈을 감았어. 이들 형제의 두터운 효행과 뜨거운 우애는 조정에까지 알려져 죽기 전인 1699년(숙종25년)에 형제가 함께 명정을 받았어. 1708년(숙종34년) 두형제가 함게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이경설은 58세요, 이경익은 53세였어. 1723년(경종3년) 이정환, 이경설, 이경익 3인 모두 효로써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으며 이해 3월 현존하는 3효자의 정려를 건립하기에 이르렀지.

재영 : 효자가 셋씩이나 배출되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집안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쌍효자 정려
아빠 : 송원2리로 가볼까.
송원2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 ‘원호(遠湖)’이지. 예전에는 ‘머레’라고 불렀는데 마을이 강변에 위치하여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많이 왕래하였던 곳이지. 수원백씨와 유씨들이 많이 사는데 물이 마을에까지 들어와서 마을이 마치 먼 곳에 보이는 호수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원호(遠湖)라 부르게 된 거야.

머레 중심 마을을 ‘산적말’이라고 부르지. 날랭이 마을로 산에 늙은 소나무가 많아 마을 가운데에 수령이 약2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느티나무의 잎이 일찍피면 풍년이 들고 늦게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지. 사람이 아프면 이 나무 앞에서 경(經 - 굿)을 읽었으며 그러면 병이 나았어. 그리고 죽은 나뭇가지(삭정이)를 갖다 불을 때면 동토가 난다고 하여 그 나무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였지. 정월대보름에 보름제를 지냈으나 1970년경 이후부터 지내지 않았어.

머레 남쪽에 있는 금강의 나루를 ‘한림정 나루’라고 부르는데 강 건너가 금남면 영곡리의 한림정이 있는 곳으로 건너다니기 때문이지. 또 이곳을 ‘배터’라고도 부르고 있어. 옛날에는 강경에서 온 소금, 새우젓, 굴비 등을 실은 배가 이곳에 왔어. 위로는 부강까지 올라갔으니 많은 상선이 왕래하였고 밀, 보리방아를 찧기 위하여 머레에서 공주까지 운행하는 배도 있었어.

송원1리에서 돌아오는 곳을 ‘구레’라고 부르고 ‘개사귀’라는 논도 있고 ‘추경밭’이라는 밭도 있지. 대추나무가 많은 곳을 ‘대추나무골’이라 부르고, 보(洑)의 안에 동네가 있다 하여 ‘보안골’이라 부르며 무당이 굿을 하다 떨어져 죽은 바위를 ‘무당바위’라 부르지. 골이 쑥 들어가 벽장처럼 생긴 골을 ‘작은 벽장골’, ‘큰 벽장골’이라 부르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을 ‘참샘골’이라 부르는데 옻, 피부병에 걸린 이는 이 물로 목욕을 하면 나았어. 미친 사람이 이 물을 먹고 고친 적도 있어. 사람이 죽으면 우선 가묘를 하던 곳을 ‘체봉골’이라 부르고 서당이 있던 곳을 ‘글방’이라 부르는데 6․25사변 때 없어졌어. 벽장골 옆 큰 산을 ‘매봉재’라고 부르는데 매처럼 높은 곳에서 주위를 관망할 수 있는 곳이기에 매봉재라 부르고 있어. ‘장구배미’라는 논이 있고, ‘기와배미’, ‘네모배미’라고 부르는 논도 있지.

이곳 마을에는 독립유공자 정낙진(1927년생)씨가 살고 계시지. 정낙진씨는 일제시대 소학교를 다니면서 조선독립단에 입단하여 연락책을 맡아 도서관 등지에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일본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군에게 잡혀 현창석, 최용석, 강종금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셨어.

머레에 있는 정려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줄까?

재영 : 머레에도 정려가 있어요?

아빠 : 그래. 이곳에는 쌍효자각이 있지.
이곳은 효자 임자의(林自儀, 1672~1717년)와 임태선(林太先, 1675~1720년)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야.

임헌회(林憲晦) 선생이 지은 「임효자 형제 정려기」에 의하면 임자의, 임태선 형제는 가각 1752년에 고을의 선비들이 형제의 효행사실을 수령(공주목사)에게 호소하였고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였으며 감영에서는 조정에 아뢰어 조정으로부터 명정을 받았어.

두 효자는 본관이 부안이고, 동생 태선은 본명이 태의(太儀)였어. 아버지인 임상담(林尙談)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므로 홀어머니인 경주최씨 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모두 어린나이에도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의 우애도 깊었어.
어느 날 어머니께서 병에 걸리게 되자 형제는 서로 번갈아가며 병간호를 하였고 어머니의 변을 맛보며 병을 고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제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묘 아래에 초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호곡(號哭)을 하였어. 그런데 하루는 호랑이가 오두막집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 두 효자는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의 불효를 보고 해치려고 하느냐?”하였어. 그러나 호랑이는 매일같이 나타나서 앉아 있다가 아침에 닭이 울면 물러갔지. 그런데 하루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문득 형제의 꿈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어느 곳의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했으니 빨리 구해달라고 청하였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호랑이가 알려준 곳으로 달려가 보니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있었어. 형제는 포수에게 간청하여 재물을 주고 호랑이를 풀어주었어. 그래서 효자의 정려를 받게 된 것이지.

재영 : 송원리에는 유난히도 정려가 많은 것 같아요.

   쌍효자 현판
아빠 : 그래. 송원리에서 받은 정려를 정리하여 볼까.
열녀로는 일개 열녀비가 있고, 충신으로는 유지걸의 충신정려가 있고, 만자골에는 효자 이정환, 이경설, 이경익의 정려가 머레에는 효자 임자의, 임태선 정려가 있어.
총7개의 정려가 있는 것이지. 그러니 작은 마을에 7개의 정려는 흔한 일이 아니야.

재영 : 정려마을이네요.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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