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무릎꿇린 스토리 중국경극 금지 명령”
“당태종 무릎꿇린 스토리 중국경극 금지 명령”
  • 김장수 유성태극무술관장
  • 승인 2016.11.06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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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시성에 가다] <4> 폐허로 방치 안시성터에서 역사의 비애 느껴

   안시성 서쪽 문 입구에는 성벽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성 내부에는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가 중국무술을 한지도 40여 년이 다 돼간다. 일찍이 고향을 더나 직장생활을 할 때에 70년대 말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충북 청주시 남주동에 있는 중국무술도장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혹시나 청주에 가면 들려보는데 지금은 새 도시로 변해 옛 기억에만 남아있다.

우리나라 중국무술의 전환점은 1990년 북경아시안 게임이다. 그전에 중국무술은 전통쿵푸에 의존하였다면 90년 이후에 중국에서 북경아시안게임을 대비하여 중국전통무술을 현대무술로 발전한 것이 장권, 남권, 태극권으로 분류한 우슈이다. 현재의 중국무술은 고유한 전통무술을 가르치던 도장은 사라지고 현대무술 중심의 우슈도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일찍이 우슈의 필요성을 깨닫고 1991년 12월 25일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무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 중국을 방문한 곳이 흑룡강성체육운동학교이다. 매년 겨울 또는 여름방학을 동안에 우슈와 전통권을 배워왔다. 94년 여름에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흑룡강체육운동학교에서 중국무술을 배우는 것보다 북경체육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1991년 흑룡강성체육운동학교에서 중국 현지에서는 처음으로 중국무술을 배웠다.
 1996년 8월 중국 진가구에서 진식태극권의 고수인 왕서안 노사(사진 중앙)로부터 무술을 지도받았다.
중국무술에 매 말랐던 나는 91년 봄 서울에서 우연한 기회에 지인을 만나 중국 흑룡강성에 있는 무술선생을 소개받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동본 성씨였다. 봄부터 서신으로 주고받는 중국무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중국을 방문하여 보니 그는 나보다 2살 아래인 권투교련(코치)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내가 권투를 하다 보니 중국무술교련들을 많이 알고 있어 형님이 원하는 무술은 다 배우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는 형님동생으로 만나 소림사는 물론 온현 진가구와 북경체육대학에서 중국무술을 배우게 되었다.

1995년부터는 흑룡강에서 북경체육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무술수업을 배우게 되었다. 북경체육대학의 무술수업료는 1일 80달러 정도이면 숙식제공은 기본이며 오전에는 무술수업과 오후에는 북경시내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날 쯤 “오늘 저녁은 중국경극을 보러간다.”고 하면서 왕부징에 있는 극장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중국경극을 보았는데 경극하는 사람들을 보니 쿵푸실력이 대단하게 보였다. 경극을 보면 먼저 유연함과 시선의 표정관리가 나를 매혹시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룡과 홍금보 역시 경극출신이라 한다.

중국경극은 사실 오래된 것이 아니라 청나라 때 지방에 있는 각종 경극을 모아 북경에서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 중국경극이다. 따라서 청나라 초기에 개혁개방을 하면서 서구식 오페라(奧劇:중국어로는 오극)를 중국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을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화살촉과 갑옷 장신구 등이 땅 밑에서 발굴된다고 한다. 
그런데 경극 중에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을 현대화시킨 등소평(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이전에 중국경극(中國京劇) 중에서 당태종(唐太宗 李世民,599~649)과 설인귀(薛仁貴 613~683) 연개소문(淵蓋蘇文,?~665?)을 소재로 한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경극(京劇)은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스토리를 공연했다. 연개소문이 안시성 싸움의 기세를 몰아 당태종을 쫓아 장안(서안, 西安)까지 찾아가 당태종을 무릎 꿇리고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내용을 경극(京劇)화 한 내용이다.

‘안시성’전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고구려 군사가 중국황제를 유린하고 우리민족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인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위세를 떨친 대명사이다. 그 후 오늘날 대한민국이 90년대 초부터 20여 년간 중국을 앞선 시대였다. 이 시기가 바로 중국 정부에 의한 역사왜곡의 시작으로 고구려도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동북공정(역사 왜곡 사업)을 시작한 시기이며, 그 시작이 바로 안시성부터이다. 그래서 중국 당국은 ‘연개소문(淵蓋蘇文) 관련 경극(京劇)을 금지’ 시키고 다음 목적지인 “호산산성(虎山山城. 원래 고구려성)을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시작”이라고 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안시성 중앙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멀리 허무러진 산성의 모습이 보인다.
안시성에 가면 볼 것이 없다. 표석은 무너져 있고, 성터의 흔적도 없다. 주변산세는 말굽모양을 되어 남향으로 아늑한 모양이며 열넷 정도의 가구가 모여살고 주변에는 농작물과 과수원으로 변해있다. 함께 만난 주변사람들은 밭을 일구다 보면 화살촉과 갑옷, 병장기들이 많이 출토되어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아랫마을 입구에 간판 없는 사무실이 있는데 이곳이 안시성 복원사무실이라고 소개는 하였는데 너무 지저분하고 주변정리가 안되어 보여주기가 곤란하다며 쪽지에 전화번호를 써주는 것이었다. 다음에 혹시 오시면 미리 전화 한번주시고 오시라는 것이었다.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이 싶지 않았다. 정 선생의 친구가 해성시 방송국에 있어 자기도 여기 안시성에 오기가 쉽지 않아 부탁해서 함께 안내해 주었다. 다시 한번 호의에 감사드린다.

 안시성 입구에 영성자산성이라고 새긴 표석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아 중국당국의 무성의한 관리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은 우리의 역사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안시성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이 화살로 당태종의 눈을 맞은 부상의 기록은 중국역사의 기록에도 볼 수 없고 우리나라기록에도 없다고 한다. 다만 연개소문이 죽고 난 700여년이 지난 후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중국 경극 어니하도 우리나라의 기록과 흡사한 내용으로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안시성을 비롯한 동북지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들의 역사가 송두리째 날아가고 있는데 우리 당국은 제대로 연구하면서 대처할 계획이나 세웠는지 답답할 뿐이다. 이제 이민족의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 안시성 터에서 후손으로서 역사의 비애를 느꼈다.
  안시성복원관리사무실은 아직도 간판도 없어 중국당국의 무성의한 역사유적 관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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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후사랑 2016-11-07 21:52:54
중국무술기행에서만 볼수있는 내용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