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돌아가는 방법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를 놓치지 않고 함께 간다. 나는 약자도, 소수자도 아니라고? 혼자일 때 우리는 모두 약자이고 소수자이다. 그걸 항상 전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말은 청산유수이다. 교사의 자기 증명은 수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역사교사’로서 내 수업은 내가 가르치는 위와 같은 가치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수업이었나.
1학기 때까지는 교사 중심의 강의식 수업이 갖는 효율성과 입시 적합성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의를 위한 수업자료를 만드는 작업에 퇴근 이후는 물론 주말에도 꾸준히 공을 들였다. 올해 들어서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았고 강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모둠학습, 협동학습 모델을 현재 상황의 공적 교육 현장에 적용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의식 수업을 포기했다. 여름 방학 중 들은 전공 교과 연수가 자극이 되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수업은 토의·토론식 수업이다. 역사 교과 특성에 부합하고 민주시민으로서의 태도를 기르는 데 적합한 수업 방식이다. 중학교 2학년 수준에 도무지 맞지 않는 역사 교과서 대신 쉽게 풀어 서술한 자료를 제시하고 교육과정상의 성취기준과 핵심 내용, 수능 출제 경향 등을 고려해서 만든 과제를 매 차시 3개 부여한다. 과제는 반드시 모둠별 토의·토론을 ‘시끌시끌하게’ 거쳐 해결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지식을 상호 보완해야 한다. 사실상 이 부분이 수업의 핵심이자 전부이다.
이후 선택형 문제 2개를 개인적으로 해결한 후 교사에게 결과를 검토 받고 질의응답에 통과하면 해당 모둠의 수업이 완성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교사는 지속적으로 모든 학생들을 모니터링하고 전문가로서 비계(飛階)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먼저 교과서와 관련 전공 서적을 분석하고 교육과정에 맞게 해체·재구성한다. 이를 토대로 한 차시 당 중학교 2학년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양과 질을 예측하여 수업 자료로 가공한다. 주당 21시간의 수업, 담임 업무, 생활지도에 담당 부서의 업무가 수시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쓸 만한 수업 자료를 만들기 위해 개인 생활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있다. 주중 평균 수면시간이 5시간이다.
“솔직히 1학기 때 수업은요, 공부 잘하는 애들한테는 깔끔하게 정리되고 좋았겠지만 저희같이 잘 모르는 애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었어요. 지금은 저희 수준에서 이해가 잘 돼서 재밌어요.”“1학기 때는 시간표에 역사 있으면, ‘아 또 역사야.’ 그랬는데, 지금은 역사 시간이 기다려져요.”
수업을 바꾸고 3주가 지난 후 일부 학생들에게 받은 평가이다. 교사로서의 나를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벅찬 몇 마디였다. 학생이 수업을 좋아해주는 것보다 교사에게 더한 행복이 있을까? 고되고 힘들지만 그래도 현재의 수업 방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얼핏 누군가가 지나가다 본다면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큰소리로 얘기하기도 하고 교실을 돌아다니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토의·토론을 진행하는 학생들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보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과제를 해결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모르는 걸 질문하고, 또 대답해주고, 도와주고, 독특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며, 잘 들어주고 기록한다. 결국에는 서로의 의견과 생각을 하나로 모아서 내놓는다. 교사가 목소리 높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역설하지 않아도 훌륭하게 민주적인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멋진 학생들을 통제하며 눌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수업의 주인공은 학생들이고 교사는 주인공이 멋지게 활약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동안 혹시 교사인 내가 돋보이기 위한 수업을 한 건 아닐까.
현재 진행하고 있는 수업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여전히 교사인 내가 갖고 있는 수업의 주인공 역할을 하나씩 학생들에게 넘기는 중이다. 낯설고 귀찮은 방식이다보니 불만이 있는 학생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익숙하지 않은 방식을 훈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느리지만 함께, 같이 걷는 이 시간이 가치 있는 삶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부디 중간에 지쳐 포기하지 않기를 주연 배우와 감독 모두에게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