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곰'에서 유래, 아시나요
금강은 '곰'에서 유래, 아시나요
  • 임비호
  • 승인 2016.09.2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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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금강의 정신, 세종에 흐르게 하라

   웅진단 터 - 금강지명이 이루어진 명산대천 제례가 있엇던 곳이다.
세종시 신도시 중심에 금강이 흐른다. 금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중앙 행정이, 남쪽에는 지방 행정 시설들이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경부선을 따라 형성되었던 연기군 시절에는 그저 변방에 지나가는 큰 물줄기였는데, 지금은 도심의 중심이 되면서 세종시민들에게는 휴식과 풍광을 제공하는 핵심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세종시를 흐르는 강을 “금강”이라는 통칭으로 상류부터 하류까지 동일하게 부르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전에는 지역과 장소에 따라 금강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금강 상류 금산에서는 적벽강, 옥천에서는 회인진강, 공주에서는 웅진강, 공주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금강 하구에서는 진강 등으로 불리었다.

임선빈 박사의 “금강의 지명 변천과 국가 제의”라는 논문에 의하면 조선 후기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국가 제례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중부 이남에는 공주의 인근 강가에서 그 국가 제례를 지냈고, 명산대천 국가제례를 했던 곳의 강 이름이 금강이라고 하여 강 전체를 그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 행정 제도에 의해 금강이라는 이름이 강 전체를 통칭하는 대표 명칭이 된 것이다.

요사이 금강을 말할 때 한자 비단 ‘금’(錦)을 사용하기에 비단처럼 고와서 금강이라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왠지 금강의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금강의 ‘금’은 ‘곰’에서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기 때문이다. 옛날 곰 전설이 있는 고무나루가 변형을 거치면서 지금의 금강이 되었던 것이다. ‘곰(고)’은 ‘’ 계열어의 하나로서 방위상으로는 후(後, 뒤), 북(北)을 뜻하면서 또한 큼(大), 많음(多), 신성함 등을 나타내는 옛말이다.

곰이 의미적으로 후(後, 뒤), 북(北)을 나타낸다는 것은 검다라는 것과 연동이 된다. 즉 북쪽을 색깔로 배속할 때는 “검다”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곰과 검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더 나아가 북쪽은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과 연결이 된다. 북(北)이라는 방위가 통치의 개념과 연결될 때는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땅의 중심인 임금은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곰사당 - 곰나루 솔밭사이로 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결국 금강이라는 말은 ‘곰나루’에서 왔고, 그 의미는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에서 인준을 받은 땅의 중심인 임금의 왕궁 뒤에 있는 강’이라고 유추 해볼 수 있다.

또한 금강을 백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백제시대와 연결이 된다. 백제는 왕궁을 옮길 때 과거에 사용한 지역명과 사물의 명칭들을 동일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백제가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에도 왕궁 인근에 있는 강을 백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때 사용한 “백(百)”은 숫자적인 의미보다 “많다” “크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또한 한글 “크다” “완전하다”라는 의미의 “온”과도 연동이 된다. “온전히”라는 말을 할 때의 온이 전체, 완전하다라는 의미가 있듯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온”은 완전한, 크다라는 뜻이 되고, 이를 한자로 음역 하면 백(百)이 되는 것이다.

금강 지명의 발생지인 지역을 우리는 현재 공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때도 “공”은 곰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공은 “크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공주는 그런 의미에서 큰 땅이라는 뜻이 된다.

금강할 때의 금, 백제할 때의 백, 온조할 때의 온, 공주할 때의 공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금강과 인근 지역명 속에는 하늘로부터 인준을 받은 왕제의 도시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역사적으로 금강은 시대의 변혁을 촉발하는 시발점이 되거나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표징들이 많이 나타난다.

   곰나루 전경 - 멀리 보이는 산이 연미산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면서 2만 5천의 포로가 잡혀가는 사건을 통하여 금강변 유왕산에 모인 민초들 가슴속에 민족의식이 태통되었던 사건, 반역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금강 아래 사람들은 조정에 등용시키지 말라는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근거한 차별이 변혁의 갊망을 체화되게 하였던 배경, 세상에는 양반, 평민, 노예라는 신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평등하다고 외쳤던 조선 중기 죽도의 정여립 사건, 반봉건 반제국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 농민군의 우금치 항쟁 사건 등은 금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혁을 위한 일련의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창을 하면서 새로운 수도의 장소로 계룡산 아래의 신도안을점지한다던지, 정감록의 정도령이 이곳에서 나온다고 한다던지, 논산 옆 연산에서는 주역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역이 나오는 것들이던지, 박대통령 시절 백지계획(수도이전 계획의 프로젝트명)의 대상지가 되고, 노대통령 시기에는 신행정수도 대상지가 되었던 것들은 이 곳이 새하늘 새 땅의 기운이 넘지는 것을 역사적으로 검중하는 표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공주대 환경과학과 졸업,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세종시 환경정책위원, 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지금의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세종시는 이런 역사적 배경들 속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금강의 시대 정신을 바로 계승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종시민의 시대적인 사명일 것이다. 새하늘 새땅, 후천개벽, 평등과 변혁의 세상을 향한 금강의 시대 정신을 읽는 것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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