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축복의 저주일까"
"아름다움은 축복의 저주일까"
  • 임영호
  • 승인 2016.09.05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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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칼럼]괴테 파우스트<하>,그리이스의 미, 헬레나의 실체는?

그리스 미, 헬레나는 본능적 욕구의 대상이다.

   헬레나(영화 트로이,2004)
헬레나는 고전미의 화신이다. 괴테는 그런 헬레나를 현대적 미의 이념으로 바꾼다. 아름다움은 역사적 조건인 시간과 장소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헬레나라는 이름도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헬레나가 한도 끝도 없이 드높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아름다움으로 타고 났다는 의미이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대담하기 짝이 없는 모험에 뛰어들도록 한다.

그리스 미의 본성은 걷잡을 수 없는 본능적인 욕구이다. 오로지 성적 욕구와 환락이 대상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소유하는 것이 명예나 명성이 전부인 영웅적 존재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이다. 헬레나는 강탈당하고 유괴되고 유혹당하고, 영웅들은 그녀를 빼앗기 위하여 살인이나 약탈, 심지어는 전쟁도 불사한다. 아름다움은 트로이 전쟁에서 보다시피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파멸적 재앙이다. 헬레나는 찬탄도 많이 받으나 욕도 많이 먹는다.(8488)

새로운 헬레나는 아름다움에 마음과 가슴을 강조한다.
헬레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축복이 아닌 운명의 저주로 받아들인다. 헬레나와 접하게 된 망루지기 린케우스가 헬레나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도취하여 망루지기로서의 경계 의무를 잊어버려 처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의 처벌이 그녀에게 맡겨지자 헬레나는 관용과 화해라는 고전주의적인 미의 이념에 상응하여 작용한다. 헬레나의 아름다움은 분노를 억제시키고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호감을 표현하게 한다. 린케우스의 노래를 들은 헬레나는 자신의 귀에 이상스럽게도 정답게 들린다고 한다.

“하나의 소리에
다른 소리를 따라가는 듯하고
하나의 말이 귀에 들어오면
다음 말이 따라와서
첫 번째 말을 애무하고 있어요.” (9369~9371)

미의 이념이 조금씩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와의 대화에서 헬레나는 아름다움에 마음과 가슴을 강조한다.(9377~9380) 단순한 육체적 합일이 아니라 영적이며 내적인 합일로 승화한다. 둘은 육체적・감각적으로는 물론 내적・정신적으로도 완전한 합일을 성취했다. 헬레나는 비로소 18세기의 사람이 된 것이다.

아름다운 이상세계에서 공동체 지향의 현실세계로 나온다.
제4막에서 아름다움의 추구로부터 환멸과 회한밖에 얻지 못하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파우스트에게 다시 한 번 쾌락을 주려고 악마는 시도하지만 파우스트는 황제의 명을 받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뿌리친다.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황제에게 거대한 영토를 하사받아 부유해진다.

괴테는 노년기에 5막 소위 ‘지배자 비극’을 완성했다. 5막에서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이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나온다. 비현실적인 환상적 목표에 매달리지 않고 지상이라는 현실세계에서 공동체 지향적인 목표를 세우고 무엇인가 이루려한다. 인류사회의 공익을 위하여 새로운 노력을 한다. 배경은 간척 사업하는 곳이다. 파우스트는 황제에게 아무 쓸모없는 바닷가의 습지를 받아 개척한다.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선의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다.
개발지상주의자인 그는 영원한 반복을 통해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파도 곧 자연의 지배력에 대항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파우스트적 진리이다. 제방 공사를 기획하여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짠다. 간척사업에 방해되는 노부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와중에 불이 나고 바람이 불어 오두막은 타버리고 노부부는 죽는다.

먼저 파우스트가 과업을 실행하기 위하여 행한 비인간적인 사업추진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간척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채찍과 수탈의 대상일 뿐이다. 파우스트는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잘사는 공동체 국가를 이루기 위한다지만 버려진 땅을 개간하기 위하여 선의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다.

 

미래의 낙원을 위해 ‘현재의 노예화’라는 대가를 통해서 얻으려는 ‘유토피아’에 대한 조롱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결과에 대한 괴테의 예언자적 경고이기도하다. 파우스트 비극에 대한 결론인 셈이다.

파우스트적인 인간은 자아 중심적이다. 극도의 주관적 편집증을 갖고 있다. 그의 의지만이 절대적이다. 작품은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 진리인양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악마도 파우스트적 주체의 절대화가 완전한 사회성 상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할 것이라고 말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고 사회적 삶을 어렵게 한다.

이 파우스트적 지배자 형상이 20세기 나치 독일에서는 영웅적 모델이 된다. 국가 전체를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 나치는 많은 것을 금서로 정했지만 ‘파우스트’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는 자만이 가질 자격이 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11559~11586)은 파우스트의 비전이 집약되어있다. 이 부분은 읽는 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의미가 다양하다. 괴테는 생전에 이 부분이 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될 거라고 예견했다. 파우스트는 양심의 가책을 스스로 느끼고 점점 눈이 멀게 된다.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진리를 보는 내면의 눈은 열렸다. 삶은 이제 더 이상 채색된 영상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파악된다. 눈 먼 파우스트는 한낱 비유일 뿐인 무상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그것들 뒤에 숨어있는 진실한 실체를 예감할 수 있다.(12105)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이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1576~11580)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
파우스트는 이미 ‘천상의 서곡’에서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11586)을 맛본다면 자신의 삶을 가져가도 좋다고 악마와 내기를 걸었다. 마침내 이 대목에서 그러한 순간에 도달한다. 실제로 뭔가를 이루고 충족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파우스트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수로(水路)를 파게했지만 인부들은 그 수로를 무덤이라고 불렀다. 파우스트는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잘 진척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배자 비극의 지상 낙원도 한갓 주관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11585) 상상 속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파우스트의 죽음을 맞이하여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지옥으로 수습해 가려한다. 이때 천사들이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 (11935) 라고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욕구는 대단하다. 인간이 완전히 멈추어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생각한다. 파우스트는 말한다. 삶은 허무한 것이 아니고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열심히 무엇인가 행동하라. 실패하더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
20대에 작은 바이마르 공국의 장관을 지내면서 문학. 회화, 음악, 광학, 식물학, 동물학, 색채론 등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길 정도로 평생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치열하게 추구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관을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보이는 것만 보았다.
‘파우스트’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실로 “‘파우스트’는 전혀 불가측한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우스트는 읽기 어려운 책이다. 더군다나 괴테가 죽기 8개월 전인 1831년 그의 나이 82세에 완성했으니 젊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중년을 위한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낌은 있었다. 나는 보이는 것만 보았다. 그것은 전체 중 아주 작은 부분일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 인간이 사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의 생각도 그랬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랑하고 자식 낳고 부와 명예와 괘락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 순간들은 덧없이 흘러가고, 늙고 병들고 죽고, 고통이 있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현실세계에서 크게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꿈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1814년 슈베르트가 17살이 되었을 때,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며 물레를 돌리며 실을 짜는 그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레트헨의 독백의 시로 만든 가곡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서있지만 불안하고 비극적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신의 힘을 벗어나 자유의지대로 마음껏 해보았지만 인간의 한계만 확인한 셈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하여, 향락세계에 빠졌다가 반성하고 자제하여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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