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에 소원빌어 이루게한 '월성'
달밤에 소원빌어 이루게한 '월성'
  • 임영수
  • 승인 2012.09.25 18: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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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높은 정이에서 나온 마을 '고정리'

   고정일 마을 표지판과 담배 건조장
고정리는 백제 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고려 현종 때부터 공주군에 속했었다. 조선 태종(太宗)때 연기현이었다가 말엽에는 연기군 남면의 지역으로 ‘높은정이’ ‘고정(高亭)’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고정리(高亭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아빠 : 이곳을 범지기라 부른다.

재영 : 범은 호랑이를 말하나요?

아빠 : 그래. 호랑이를 범이라 부르고 있지. 그래서 이곳을 호준이라고도 해.

재영 : 범지기라고 부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아빠 : 마을 뒷산을 보아라. 산의 모양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란다. 옛날 이곳에서는 실제로 호랑이가 살았는데 이 호랑이가 연약한 여자들만 괴롭혔단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남자를 여자처럼 변장하고 범을 유인하여 잡았는데 범을 잡으려고 지키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호랑이가 떼 지어 나타나 사람을 해치게 된 것은 이곳의 산에 있는 산신을 잘못 모셨기 때문이라 생각한 주민들은 정성을 다하여 산신제를 지내자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단다. 이곳의 산제는 약150여 년 전부터 지내오고 있어.

   고정1리 마을 회관
재영 : 범지기란 이름은 참 특이해요.
우리가 넘고 있는 이 고개도 이름이 있겠지요?

아빠 : 이 고개를 은고개라 부른단다.
조선말엽에 곽정승(郭政丞)이 이곳에 선친의 묘를 마련하고 돌아갈 때 이곳 고개에서 한 스님을 만났지. 스님이 말하기를 곽정승이 끼고 있는 은가락지를 부처님께 시주하면 자손대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하였어. 곽정승은 은가락지를 빼서 스님에게 넘겨주었지. 그 후 자손들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야. 또 이곳에서는 은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어.

재영 : 이곳 마을에서는 곽씨들이 많이 살고 있나 보지요.

아빠 : 예전에는 많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리 많이 살지 않아.

재영 : 저기 높은 산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빠 :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르지. 고려말엽에 어지러운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하여 3정승이 국론을 협의한 산이라 하여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른다고 했어. 또 이산을 섬기면 그 섬기는 집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1년에 한번씩 산제를 지내며 국사사(國士師)를 모시고 있지. 옛 지관이 이곳 국사봉 아래에는 8명당터가 있다고 했어. 둔덕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봉화를 올린적도 있다고 했어.

   어서각 어필

재영 : 이곳 마을 이름이 월성이라 부르는데 유래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빠 : 반월터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의 형태가 반달과 같은 지형이지. 옛날 이곳에는 단란한 부부가 살고 있었어.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어. 자식하나 얻는 것이 소원이어서 항시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시주를 원하기에 시주를 듬뿍하고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묻자 달이 밝게 비치는 밤에 달이 뜰 때부터 달이 질 때까지 기도를 하라 해서 하루는 달 밝은 밤에 기도를 드렸더니 소원을 이루었지. 그때부터 이곳을 월성(月城)이라 부르게 되었어. 자 고정2리로 가볼까.

재영 : 이곳을 높은 정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가 있나요.

아빠 : 여기에는 어서각(御書閣)이 있는데 높은 언덕에 있어 ‘높은정’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

재영 : 어서각이 뭐예요.

아빠 : 한마디로 임금님의 글씨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지.

재영 : 임금님의 글씨요. 자세히 들려주세요.

아빠 : 어서각의 주인공인 강순용(康舜龍)은 고려시대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는데 원나라에 갔다가 1354년(공민왕3년) 귀국하여 밀직부사(密直府使)로 있다가 7월에 은성부원군이 되어 생활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가람산 치마대 초야에서 후배양성에 힘쓰면서 살았지. 이 무렵에 이곳에서 이성계(李成桂)가 무술을 연마하다 목이 말라 우물로 물을 마시러 내려왔어.

   어서각
마침 그곳에서 물을 기르고 있던 강순용의 여동생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자 그녀가 표주박에 물을 떠서 수양버들 잎을 띄워드리니 이성계가 그 연유를 묻자 “갈증이 심하신 듯하여 급히 마실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잎을 띄었습니다”라고 하였어. 물을 너무 급히 마시면 탈이 날 수 있거든.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감탄하였어.

후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강순용의 여동생을 성후(聖后) 현비(縣妃)에 책봉하고 그의 아버지 강윤성(康允成)에게 상산분원군(象山府院君)을 봉하였고 남매간인 강순용에게 교지를 친필로 하사하였어. 어서(御書 - 임금님의 글씨)를 후손들이 간직해 오던 중 영조대왕(英祖大王)이 이를 보고 친필로 발문을 써서 어서각을 건립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정조대왕은 성덕왕후가 출생한 곳에 비각을 세웠어.

현재의 어서각은 영조 때 사액(賜額 - 왕명으로 현판을 써서 걸음) 하였던 것을 1864년(헌종12) 건립하였다가 고종황제가 이 친필을 보시고 사적을 하사하니 현재 태조, 세조, 영조, 고종의 4임금 어필을 소장하고 있지.

재영 : 지금 이곳에 네 분의 임금님 글씨가 소장되어 있다고요?

아빠 : 그래. 그런데 지금은 그 원본을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어.

   어서각

재영 : 도난 때문인가요.

아빠 : 도난도 문제지만 그 귀한 것을 잘 보관하려면 이곳보다는 규장각이 더 안전하지. 자 이렇게 오늘까지 남면지역을 돌아보았고 내일부터는 금남면지역 중 세종시에 편입되는 반곡리, 석교리, 봉기리를 돌아볼까.

재영 : 예. 그곳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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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석 2012-10-11 07:52:13
늘 찾고 있던 이야기 였습니다. 현재는 우리 골프장이 있기 때문에 이 지명의 유래를 알고 싶었는데 이제 가슴이 후련합니다. 멋지 연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