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 인간의 도리로 살다
퇴계선생, 인간의 도리로 살다
  • 임영호
  • 승인 2016.02.09 0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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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칼럼]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퇴계 선생이 인간의 도리를 말한 책 '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빠르게 변하고 쉽게 생각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광풍에 휩쓸려서 어디론가 내동댕이쳐지는 추풍낙엽 신세가 아닐까? 이럴 때 단단하게 부여잡고 버틸 수 있는 그 무엇은 없을까? 우리를 붙들어 매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다. 어느 누구보다도 어지러운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고 사람답게 선비답게 살았던 퇴계 이황의 삶과 철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철학하면 일단 어렵다고 생각한다. 퇴계 철학관련 행사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이 주류를 이룬다. 일반 범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아주 평이하게 써서 학생이나 일반 교양인에게 읽기 안성맞춤이다. 기기묘묘한 이론서라기보다는 철인(哲人)으로써 본받을 만한 한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 있다.

이 책 제목은 길다.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하창환· 김종석 두 분이 쓴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하지 못한다."는 제목의 퇴계 이황 선생(이하 '선생'이라 칭한다)에 관한 책이다. 많이 알려진 일화를 중심으로 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교훈을 소개하고 있다.

퇴계철학의 중심은 이(理)
선생은 12살이 되던 해 삼촌인 송재공에게 논어를 배운다. 논어의 첫 번째 편인 학이편(學而篇)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 사람에게 공경해야 한다." 선생은 이 구절을 읽고 크게 느끼고 다짐한다. 사람은 자식이 되고서 그 도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논어의 마지막 편 바로 앞 자장편(子長篇)의 글에 이(理)라는 주석이 달려있는 것을 보고 퇴계는 송재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이(理)라고 합니까? 바로 이황의 철학 중심 단어는 이(理)이다. 그는 주리논자(主理論者)이다. 이(理)는 이치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의 원리뿐만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할 윤리규범이라는 뜻이다. 배가 물위를 가고 수레는 땅위를 가는 것처럼. 

진리는 실천을 통하여 인식
선생은 생활 속에서 이것 이(理)를 실천한다. 선생의 철학을 그래서 흔히 실천철학이라 한다. 진리는 언제나 일상 가운데 있다고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진리는 늘 먼 추상적 세계에서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자기 주변에서 찾을 것을 강조했다. 

선생이 살았던 20대 젊은 시절에 조선의 상황은 재야의 선비집단과 중앙의 훈구세력이 국가운영을 놓고 대립하던 시기였다. 신진사류로 불리던 선비들이 공신과 외척들이 갖고 있던 막대한 토지와 특권을 어떻게든 축소시키고, 나라를 선비들의 공론에 의해 운영해가는 왕도정치를 시행하려 했다. 또한 선생의 50대 장년시절에는 왕위계승을 놓고 왕실의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이 크게 다투던 시기였다.

세간의 인심도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간다. 학문적 진리는 본래의 정신을 떠나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관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천박한 풍조로 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실천을 통해서 인식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만 논하는 지식은 인간의 삶을 옳게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언뜻 그의 철학은 무색무취한 평범한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래서 과연 퇴계 철학은 있는가라는 논란을 빚기도 한다. 선생은 김부륜이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심정을 말했다. "내 비록 늙고 아는 것은 없지만, 젊을 때부터 성현의 말씀을 독실하게 믿어서 세간의 비방이나 칭찬, 영화와 욕됨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또한 별난 주장을 하여 사람들로 부터 괴이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덕은 길러주는 주역을 공부
선생은 20대 젊은 시절에 소백산 어느 절간에 들어가 공자께서 끈이 세 번 이나 끊어질 때까지 읽었다던 주역(周易)을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는 흔히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은 주역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자신에게 이해득실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지자연의 이치나 주변의 여러 여건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나아가고 물러 날 때를 알기 위함이다. 한 마디로 노인들의 지혜와 같이 사람의 덕을 길러주는 책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묘사화로 희생된 정암 조광조(趙光祖)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이렇게 조정암을 평가했다. “옳은 말이라도 시대를 헤아려야 한다. 그의 자질은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나 때를 헤아리고 주변의 정세를 살펴 일을 조화롭게 처리할 수 있는 덕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선생의 진리 관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낙동강에는 은어가 살고 있다. 당시 은어는 왕께 받치는 진상품이었다. 계절이 되면 관에서 통발을 놓는다. 이 강가는 도산서당과 지척거리로 선생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던 곳이다. 선생은 일당 통발이 설치되면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들에 비하여 이권에 대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는 만큼 혐의 또한 받기 쉽기 때문이었다.

   퇴계 이황선생 초상화

생활 속에서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경(敬)이다. 경(敬)은 자세를 단정히 하고 마음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수양과 외적인 행동의 절제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번잡한 실제 생활을 중시하되 경의 실천을 통하여 냉정하고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욕망을 절제하여 인간의 품성이 올바로 발휘 되도록 한다.

생활 속에서 실천되도록 숙독
선생의 독서법은 숙독(熟讀)이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익숙토록 읽는 것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을 이해하더라도 익숙하지 못해서 읽으면 곧 잊어버려서 마음에 간직할 수 없다. 배우면 반드시 복습하는 공력을 들인 뒤에야 비로소 마음 속에 지닐 수 있고 흠씬 젖어드는 맛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주자(朱子)의 독서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책에 담겨있는 성현의 말씀이 모두 그 책을 읽은 사람의 것이 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현의 언행을 마음에 새기고 침잠(沈潛)하여 탐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함양되어 학문이 진보하는 성과가 있는 것이다. 만약 대충대충 읽고 대강대강 말해버린다면 이것은 말마디나 외우고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말습(末習)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     

글을 읽는 목적이 글자를 외우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외워야하는 것은 함양(涵養), 즉 글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덕을 기르고 닦기 위함이었다. 결국 선생은 지행병진(知行竝進), 아는 것과 행동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바탕으로 자기의 삶을 그려내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인 인(仁)을 중시
선생은 예(禮)는 인정(人情)에 바탕을 두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 벼슬을 쉬고 향리에 있을 때 제자들이 술을 가지고 선생을 찾아왔다. 마을에 선비들이 모일 때 어떤 순서로 앉는 것이 옳은가라는 애기가 나와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지위나 가문, 나이순 등 자기주관에 따라 판단하여 주장했다. 

선생은 세속적인 형식이나 지위가 아닌 인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어버이에 대한 효도나 연장자에 대한 공경 같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는 것이다. 선생은 본성에 따르는 것이 세속적인 지위나 가문의 권위보다 우선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유교의 핵심적 가치인 인(人)이다.

치인지학(治人之學)이 아닌 수기지학(修己之學)
선생은 과거 공부를 진정한 공부로 여기지 않아 과거 공부를 위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이 과거를 보는 것을 막지는 아니하였다. 한 가문의 양반으로써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늘 벼슬길에 나아가는 도리보다 물러나는 도리를 강조했다. 제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난진이퇴(難進易退)라 했다.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자신의 학문과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부를 때마다 성실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명분과 의리에 맞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벼슬이라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고통스럽게만 한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친형과 권질을 비롯한 처가의 무고한 희생 또는 본인의 온건한 성격이나 병약한 체질등도 간접적인 원인이다.

선생은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비움을 높이 여겨 털끝만큼도 자만하고 꾸미는 마음이 없었다. 우러러보면 의젓하여 법도에 맞는 몸가짐이 공경할 만하고, 가까이 하면 따스하여 너그러운 덕이 사랑할 만 했다.

선생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는 참 많다.
유배 온 권질의 청에 의해 온전한 정신이 아닌 그의 딸 권씨 부인과의 결혼이나, 죽은 후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마치 부인의 영혼을 위로하듯 지켜준 일이나, 청상 과부된 둘째 며느리의 개가를 권한 일이나, 젖을 못 먹는 증손자의 유모로 선생의 집안 여자종 중 방금 아이를 낳은 여종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것을 노비 자식을 걱정하여 거절한 것이나,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도 모두 자기 스승이라면서 항상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나, 조선시대 최고의 학술논쟁으로 평가되는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을 8년 동안 지속할 때 무려 26살의 나이 차이도 불구하고 젊은 선비 기대승(奇大升)을 평등하게 대우한 것들은 그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결과이다.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고 낙향, 아름다운 마무리
선생은 69세 되던 해에 임금에게 성인이 되기 위한 성학십도를 올린 후 낙향을 청했다. 임금은 벼슬만 높여주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의 거듭된 간청에 못 이겨 벼슬을 마친다는 허락은 하지 않고 다만 고향에 돌아가는 것만 허락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주변을 하나씩 정리하였다. 빌려온 책을 돌려주라고 하고 손자를 불러 간소한 장례에 관한 유언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옳지 못한 견해로써 여러분들과 종일토록 강론을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스승은 제자들이 자신을 넘어서 더 큰 세계를 바랬을 것이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돌아가신 날 눈이 한차례 내렸다.
아침에 평소 좋아했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이르고, 누운 자리를 정돈하고 부축해 일어나 앉은 채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나이 70이었다. 가신지 450년이 흘렀어도 그분의 향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이런 철인이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현재에 사는 우리에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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