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님의 영험함과 더불어 사는 땅
미륵님의 영험함과 더불어 사는 땅
  • 임영수
  • 승인 2012.08.30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 갈운리...음지-양지, 할아버지-할머니 미륵

   임서의 부인 계성왕씨 묘
여덟번째날 - 갈운리(葛雲里)

갈운리는 백제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연기현으로 연산현(燕山縣)의 영현(領縣)이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청주에 속했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연기현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산이 칡넝쿨처럼 엉키어 얼기설기 서려있고 여기에서는 물이 귀하여 구름을 보아도 물을 보는 것처럼 반가워해야 할 지역이라 하여 갈운(葛雲)이라 하였다.

갈운리 1구를 원갈운이라 부르며 ‘위갈운’과 ‘아랫갈운’으로 나눈다. 마을 뒤에 있는 매봉산은 예전에 봉화를 올렸다고 하고 갈운리에서 연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고개라고 부른다. 또 고정리로 넘어가는 곳을 은고개라 부르는데 예전에 이곳에 목장승이 있었다. 남궁산이 있는데 남궁선생 선조의 묘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LG텔레콤과 KTF이동통신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갈운 2리를 금사(金沙)라 부른다.

재영 : 이곳 마을은 큰 도로 옆에 있어 오래 전에 마을이 생겼을 것 같아요.

아빠 : 조선시대 이곳은 금사역(金沙驛)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의 역은 관원들이 업무차 이곳에 들려 말을 바꾸어 타거나 하루를 묵었다 가는 곳이지.  우리 연기군에는 조선시대 금사역(金沙驛 - 남면 갈운리), 송현역(松峴驛 - 서면 송현리, 현 전동면 송정리), 금계역(金鷄驛 - 소정면 대곡리)이 있었지. 이 중 금사역이 가장 큰 역으로 1760년에 간행한 여지도서에 의하면『금사역(金沙驛) - 현의 남쪽 7리에 있으며 성환에 속하고 리(吏)28인, 노(奴)30인, 비(婢)5명, 대마2필, 기마6필, 소마2필』이라 쓰여 있지. 또 1824년에 간행된 연기읍지에는 ‘금사역이 현의 남쪽7리에 있으며 성환에 속하고 리(吏)가 20인, 노3명, 비5명, 대마2필, 기마6필, 복마2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 곳에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세월 역(驛)이 운행되었음을 알 수 있지.

재영 :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 비는 누구의 비인가요?

아빠 : 항일투사 오강표(吳剛杓, 1843~1910)선생의 행적비란다.
오강표 선생은 본관이 보성이고 호를 무이재(無貳齋)라고 하는데, 1843년 공주군 사곡면 원가리 도덕동에서 태어났지.  당대의 거유(巨儒)였던 고산 임원회와 간재 전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품성이 바르고 의로우며 효성 또한 지극하여 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행전끈을 풀어본 적이 없이 3년 상을 마쳤다고 했어.

   양지마을 할아버지 미륵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신하의 도리로 나라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으랴?’하고 오적을 도추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청나라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구하여 공주향교 명륜당에 들어가 대성통곡한 뒤에 약을 먹었으나 반사(半死)의 지경에서 가까스로 소생하였어.


그 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광사(狂士 - 미친사람)라 하였지. 이후 오강표 선생은 세상에 살 뜻이 없다하여 명강산(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몸에는 항상 독약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하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전해 듣자 그는 절명사(絶命辭)를 지어 선산과 스승 임헌회의 묘에 고유한 후 공주향교에 들어가 글을 벽에 붙이고 대성통곡한 후 향교안에 있는 강학루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이때가 1910년 10월 16일 이었어.

재영 : 그런데 왜 이곳에 비를 세웠지요?

아빠 : 오강표 선생의 비는 공주 산성공원 입구에 하나가 있고, 그가 태어난 사곡 월가리 도덕골 산속에도 세워져 있지. 이곳은 그가 말년에 살았던 집이 있고 그의 묘가 이곳 마을 북쪽에 조성되어있어.

재영 : 아. 오강표 선생님께서 이곳에 살았었군요. 그분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크신 것 같아요.
이곳 마을에는 미륵불이 두개가 있다고 들었는데, 미륵불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려주세요.

아빠 : 갈운리에는 미륵님이라 불리는 돌장승이 마을 양편에 한기씩 있단다. 오른쪽 마을이 음지마을 왼쪽 마을이 양지마을로 오른쪽 음지마을에는 할머니 돌미륵이 왼쪽 양지마을에는 할아버지 돌미륵이 자리 잡고 있지. 모두 자연석에 얼굴만 표현했고 앞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할아버지 미륵에는 뒷면과 옆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 돌장승이 언제 만들어졌나는 할아버지 미륵에 새겨진 강희(康熙)와 경인정월16일(庚寅正月十六日)이라는 글자로 보아 1710년 1월 16일 세운 것으로 알 수 있단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장승제를 지내게 된 동기가 옛날 이곳에 금사역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멀리서 죄인을 잡아 압송하는 도중 이곳에 들려 묵고 갈 때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어. 어떤 때는 마을 입구에서 처형을 하는 등 좋지 않은 일들도 많이 벌어졌었지. 그러니 마을로 나쁜 기운이 들어와 동네사람을 해칠 위험이 있으므로 동민들이 합심하여 돌장승을 조성하여 세우고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과 병을 퇴치하였지. 이곳에서 소원도 빌었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진 거야.

   양지마을 할머니 미륵

돌장승을 이곳 주민들은 미륵님이라 부르고 있어. 처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돌미륵이 가까이 있었는데 길을 내면서 마을 입구로 옮겨 현재에는 멀리 떨어져 있지. 미륵제를 지낼 때는 한날에 지내지만 양지마을에서는 할아버지 미륵에게만 지내고 음지마을에서는 할머니 미륵에게만 제를 지내고 있어. 지내는 시기는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음력 1월 14일)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지내고 미륵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연도와 날자가 1710년 1월 16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1월 16일에 제를 올린 것 같아.

지금처럼 두 마을이 따로 떨어져 지낸 것이 아니라 같이 지냈을 것 같으며 이는 현재 제를 지내는 시간이 양지마을 할아버지 먼저 지내고 음지마을 할머니 제가 조금 뒤에 지내는 것과 할머니 미륵님을 옮겨왔다는 구전으로 보아 예전에는 두 마을이 한마을처럼 지내다 갈라졌음을 추측할 수 있어.

제를 준비하는 것은 미륵제를 지내고 내년도 제 지낼 유사를 미리 뽑지. 유사는 재물을 장만하고 제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집안에 젊은 여자(젊은 여성은 생리현상 때문에 이를 부정으로 보았다)나 환자 또는 부정한 일을 당한 이는 제외하고 마을에서 깨끗하다고 인정되는 이(효를 잘하거나 웃어른 공경을 잘 하는 이)를 유사로 뽑으면 그는 제를 지낼 때까지 행동을 조심하며 말을 조심하고 좋은 것만 보도록 노력하였으며 제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는 더욱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였어.

매일 목욕재개하고 왼산내끼를 꼬아 창호지를 끼워 대문에 매달고 황토를 대문 양쪽에 세 군데씩 놓아. 제관 집임을 알리고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않게 표시한 것이지. 유사가 하는 일은 제물준비와 제를 지내기 전 미륵님께 옷을 만들어 입히는데 창호지로 머리에는 고깔을 몸에는 옷을 만들어 입혀. 제를 지내기 전에 제관을 뽑는데 주로 깨끗하고 입담이 좋은 사람으로 뽑아. 이는 제관이 하는 일이 제를 지내고 소지 올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사정을 미리 알고 일일이 소원을 이루도록 빌어주기 때문에 입담이 좋은 사람으로 뽑는 것이지.

제관은 여러 번 하는 이가 많았고 고깔 쓰고 제관을 한 이는 임득수씨인데 그는 무당이었기에 그러했고 대개는 한복을 입고 제를 지냈어. 제 지내는 모습이 예전보다 조금씩 다르게 변하였어. 제문을 지어 읽는 것은 예전에 두 마을이 똑같이 없었는데 음지마을 오종학씨가 제문을 지어 읽다가 1997년도에 편찮으셔서 제에 참석하지 못하자 제문 없이 지내자 2001년 최원식 이장님이 다니는 사찰 스님께 부탁하여 제문을 지어 읽고 있어. 양지마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문이 없이 제를 지내고 있으며 소지 올리는 것은 두 마을이 같아. 미륵제 지내기 전에 부정한 일이 일어나면 제를 연기하지. 즉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가축이 죽거나 불이 나거나 하면 다음달로 연기하여 제를 지내고 연기한 제는 음력 2월 1일 지내.

두 마을의 미륵제 지내는 순서를 알아볼까.
양지마을 할아버지 미륵은 제물로 시루떡(흰무리로 3되 3홉을 절구에 찌어 떡을 한다), 명태2마리, 대추, 밤, 곶감을 쓰고 밤은 껍질 그대로 놓지. 향은 향나무를 잘라 피우다 요즘에는 만수향을 사다 피우고 소지는 호당 1장씩을 기준으로 2권(40장)을 준비하고 술은 예전에 직접 담갔지만 요즘에는 사서 쓰고 있어.
유사와 제관이 절을 두 번하고 제관이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미륵님 소지를 먼저 올리고 다음에 마을 소지를 올린 다음 집집마다 소지를 올리는데 세대주의 연령순으로 소지를 올리지. 예전에는 세대주 소지가 끝나면 이어 머슴 소지를 올렸고 끝으로 우마 소지를 올렸어.

미륵제가 끝나면 유사집으로 가서 미륵계를 하는데 제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참석하여 유사가 마련한 음식을 먹으면서 계를 하지. 미륵계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돈이 있는데 타동네에서 이사 온 이는 미륵계에 가입하기 위하여 돈을 냈고, 동네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건립을 하여 돈을 벌어 자금을 조성하였어. 양지마을에서는 현재 60여 만원의 미륵계돈이 있으며 이를 은행에 넣고 1년 이자로 계모임 경비를 쓰고 있어.

계원은 양지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을 동쪽 원사골은 예전부터 참여하지 않았어. 그 이유는 그곳 마을은 산너머 양화리에서 주관하는 원수산 산제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곳 미륵제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지. 마을에는 오래된 미륵계책이 있었는데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1976년부터 기록된 미륵계책이 보관되어 있어.

   갈운리 미륵제
음지마을 할머니 미륵제의 제물은 시루떡(흰무리3되 3홉을 절구에 찌어 만든다), 대추, 밤, 곶감, 사과, 배, 통 명태2마리, 초하나, 만수향이지. 전에는 사과와 배는 쓰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제물이 초라하다며 추가한 것이야.

제사 지내는 순서는 제관이 술을 따르고 절을 두 번 한 다음 축을 읽는데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 오종학씨가 축을 지어 읽었고 최근에 최원식 이장이 자신이 다니는 사찰의 스님께 부탁하여 지은 제문을 읽어. 이어 제관이 소지를 올리는데 미륵소지를 올리고 마을소지를 올린 다음 집집마다 연령순으로 소지를 올리고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 소지를 올린 다음 우마 소지를 올리고 있어. 제를 지낼 때 음지 마을이 제를 먼저 지내지 않아. 이는 건너 양지 마을에 할아버지 미륵님이 있기에 그곳이 먼저 시작하면 이어 음지마을 할머니 미륵제를 지내지.

제가 끝나면 어른들은 유사집으로 가서 미륵계를 하고 어린이들은 논둑에 모여 쥐불놀이를 하였어. 쥐불놀이를 하며 이웃마을과 쥐불놀이 싸움을 하는데 상갈운리 혹은 창말 어린이들과 쥐불놀이 싸움을 하다 다치는 예도 있으며 임난수씨가 어렸을 때 날라 온 깡통에 맞아 얼굴을 다치기도 하였어.

음지마을 미륵계 자금은 2007년 현재 120만원이며 자금관리는 미륵계 자금을 주민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자금을 불리며 자금이 없으면 풍물을 쳐서 건립하여 마련하고 있어. 요즘에는 소지 올릴 때 돈을 내게 하여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지. 미륵제를 지내오는데 정성이 부족하거나 부정을 숨기고 유사를 하면 떡이 익지 않고 설었어. 미륵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줄까?

재영 : 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얼른 해 주세요.

아빠 : 1958년 정월보름날 할아버지 미륵님 옷을 입혔어. 미륵님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여신도가 미신이라며 옷을 벗겨 버리자 사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였는데 결국 여신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그 교회는 마을 입구로 옮겨갔지.  미륵제를 지낼 때 소지를 올리는데 소지가 끝까지 타지 않고 조금 남는 것을 ‘빼지’라 불러 빼지가 나면 그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하여 모두들 소지가 무사히 잘 타서 하늘 높이 오르기를 기대하는데 제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은 본인의 소지가 하늘 높이 올라갔나 제일 먼저 물어보았어.

예전에는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므로 전염병이 쉽게 들어와 마을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미륵제를 지내면서 전염병이 사라졌어.  6․25사변 때 이웃마을 사람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이곳 마을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아 모두 미륵님이 지켜준 덕으로 알고 있지.  마을 노인들은 어렸을 때 학교에 가거나 마을을 나갈 때는 미륵님 앞에 가서 절을 하고 갔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습관이 되어 절을 했으나 요즘에는 하는 이가 드물어졌어.

마을이장 최원석씨는 여동생(최원순, 대전거주, 58세)이 키가 작아 고민을 하다 매일 미륵님 앞에서 소원을 이야기 하니 키가 많이 컸다고 했어.  1960년~70년대 학교에서 월사금을 못내 집으로 쫓겨나면 집에 가본들 뾰족한 수가 없어 미륵님 앞에 서서 월사금을 내게 해 달라고 빌면 부모님이 돈을 벌어 월사금이 마련 된 적도 있었대.  음지마을에 타올공장이 들어오는데 마을 주민들이 반대를 하였어. 어느 날 주민이 우연히 미륵님 앞을 지나는데 타올공장 사장이 미륵님께 절을 하며 이곳에 타올공장을 만들게 해 달라며 빌고 있었지. 이 사실을 동네사람들에게 알리어 반대하는 것을 철회하여 타올공장이 들어섰어.

재영 : 재미있네요. 갈운리 미륵님은 참 영험한 것 같아요.

   음지마을 미륵제
아빠 : 2006년 보름날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곳 마을 미륵제를 서울에 올라가서 재현해 달라고 하여 마을주민 모두가 민속박물관에서 미륵제를 올린 적이 있었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재영 : 더 재미있는 이야기요? 그것이 무엇인데요?

아빠 : 이곳에서는 ‘디딜방아제’라는 것이 있어. 잘 들어볼래.
마을회장이신 김인식옹에 의하면 국민학교 다닐 때 마을에 돌림병이나 나쁜 병이 돌려고 하면 어른들 7~8명이 밤에 몰래 다른 마을에 있는 디딜방아를 훔치러 간대.  김인식옹은 어느 해인가 어른들이 이웃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양화리 가래기에서 월산리로 넘어가는 곳에 외딴 집이 있는데 그 집 디딜방아를 훔치러간다 하여 따라가 보았대.

어른들은 몰래 디딜방아를 훔쳐 들고 나오다 그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와서는 그 디딜방아를 상여 나가는 것처럼 들고 상여소리를 하면서 동네까지 왔어. 동네 입구에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이 갈라지는 중앙에 세우면 양쪽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돌미륵이 있고 왼산내기를 꼬아 그것으로 디딜방아를 고정시키고 줄을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쪽으로 연결시켜 놓고 산내끼에 창호지를 끼운 다음 제물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면 이곳 마을로는 전염병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마을입구 공동묘지에는 이웃마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이를 묻느라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대. 지금은 약국과 병원이 있어 미리 예방하거나 치료하여 병을 낳게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자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저기를 보아라. 뾰족한 산봉우리가 2개 있는 것이 보이지?

   갈운리 토기공장에서의 체험
재영 : 예. 마치 두 형제처럼 보이네요.

아빠 : 그래. 저 봉우리를 ‘형제봉’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지. 옛날 이곳에는 두 형제가 살고 있었어. 형과 아우는 한동네에 살면서 처음에는 사이좋게 지냈지만, 욕심 많은 형 때문에 그만 불화가 일어났지. 형은 어떻게 하면 아우의 재산을 빼앗아 오나 궁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때가 돌아왔어. 동생네가 식구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

형은 이때다 싶어 밤에 몰래 하인을 시켜 동생 집 광에 있는 곡식과 물건을 훔쳐 오도록 하고자 미리 준비를 하였어. 드디어 동생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멀리 친척집에 다녀올 테니 집안 단속을 잘하라고 이르고는 집을 나섰어. 떠날 때 하인 둘만 남기고 갔기에 집안은 텅 빈 것처럼 쓸쓸했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지. 저녁때가 되어 두 하인은 주인 없는 집에 무슨 큰일이 있겠냐고 술을 얼큰히 한잔 하고 잠에 떨어졌어. 그 때 복면을 한 서너명의 그림자가 담을 넘어 들어와 대문을 열고 광에 있는 곡식을 나르기 시작했어.

인기척에 잠에서 깬 하인이 이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지르니, 몇 명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와락 달려들어 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난데없이 날아온 몽둥이를 한 대 맞은 다른 하인이 재빠르게 담을 넘어 달려가 동생이 묵고 있는 주막까지 가서 이 사실을 알렸어. 동생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하인들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어. 집은 불타 버리고 하인은 마당에 쓰러져 죽어 있었어.

동생은 이것이 분명 자신의 형이 한 짓임을 알고 형의 집으로 몰려가자 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싸움이 시작되었지. 여느 큰 전쟁처럼 찌르고, 때리고, 불 지르고 하기를 한참 했을까. 동생의 하인이 형의 하인들을 모두 죽이고 만세를 부르자 난데없이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천둥번개가 치더니 그곳에서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나 땅이 솟아나더니 두개의 산봉우리가 되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두 원수 같은 형제가 싸우다 변한 것이라며 싸워 이긴 동생은 큰 봉우리, 형은 작은 봉우리라 하여 이곳을 원수형제봉이라 불렀어.

   갈운리 토기공장
재영 : 그것이 단순한 전설로 들리지 않는데요.

아빠 : 그래. 이곳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뾰족한 한 개의 산으로 보이지. 이곳이 바로 연기대첩의 원수산이야.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큰형은 중국 몽고족에 동생은 고려에 대응하면 연기대첩의 역사적인 내용과 흡사한 이야기로 들리지.

재영 : 아. 그래서 동생인 고려가 이기게 된 것이네요.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