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대머리가 가발박사 만들다
선천성 대머리가 가발박사 만들다
  • 조병무
  • 승인 2012.08.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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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무의 e노트]대전역 앞 서울 가발박사 장만국 사장의 성공 스토리

   가발박사 장만국씨, 그의 대머리가 가발박사라는 별칭까지 얻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즐겁고 보람이 있습니다.”

대전역 앞 ‘서울가발박사’ 장만국 사장의 말이다.

“탈모를 고민하던 분이 제가 만든 가발을 쓰고 환한 얼굴을 보일 때 제일 큰 기쁨을 만끽하지요. 최근 탈모는 어린아이부터 시작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하게 발생합니다. 선천적 유전형, 환경에서 오는 탈모, 과도한 스트레스 등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탈모로 고민하는 분들 중에는 심각한 사회활동 장애로 고생을 많이 하지요. 머리 때문에 외부 출입을 꺼리며 지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맞선을 보면 오직 머리 때문에 퇴짜를 맞는 청춘 남녀, 비즈니스에 중대한 결함 요소로 작용하는 세일즈맨들 등 참으로 많습니다.”

“최근 외모가 큰 경쟁력이 된 시대가 되고나니 과거와 달리 더욱 가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요.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보다 멋지고 편리한 가발을 개발 보급하니 자연 자긍심도 생깁니다.”

제 가발을 쓰고 맞선에 합격 기쁜 얼굴로 찾아오는 고객이나 가발 사용 후 비즈니스에 자신감을 갖고 고객 관리를 하여 매출을 늘려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 등등 그 사례는 일일이 손을 꼽을 수가 없다.

남보다 기능성과 편리성에서 그리고 가격측면에서 차별화된 제품을 다시 말해 예술작품을 생산 판매한다는 점포로 인식시키기 위해 상호에 ‘박사’를 사용했고 이는 특허 등록을 마쳤다고 말하는 30년 업력의 대전역 앞 서울가발박사(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64-2번지).
가발손님을 위해서는 전국 어디라도 달려가는 장만국 사장을 찾아가본다.

   각종 자격증 맟 표창장
가발 박사가 된 원인은 선천성 대머리

“이게 제 원 머리입니다. 가발을 쓰고 있어 몰랐지요. 선천적 요인으로 저희 식구들은 모두 대머리(?)입니다. 사실은 이 대머리 때문에 오늘의 가발 박사가 탄생하게 되었지요. 제 동생 장만우도 대머리인데 영등포에서 저와 같이 가발 사업을 합니다. 똑 같은 고민을 풀어 보려 함께 노력하다보니 자연 좋은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탈모 당사자이니만큼 머리가 빠져 고생하시는 분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직접 사용하면서 느낀 점을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보완하다보니 자칭 주변 모두가 인정하는 가발박사가 된 것입니다. 그동안 노력한 흔적은 이 표창장 들이 잘 웅변해줍니다.”

그렇다. 점포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대통령 표창 등 수많은 상장과 감사패들이 온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에 사족을 달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가난이 이용사를 만들다

장만국 사장은 충남 청양이 고향이다. 현재 61세로 5남 2녀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그 당시 시골에서 상급학교 진학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특히 장남이 아닌 차남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나에게도 예외가 없어 15살 초등학교(지금은 초등학교)졸업 후 바로 대전으로 올라와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했습니다.

어린 나는 나의 장래를 정하는데 3가지 길을 놓고 고민했습니다. 첫째 이용직종, 둘째 양복, 셋째 자동차정비 이 셋 중에 자동차정비는 기름때를 묻히는 것이 보기에 흉하고 춥고 더운 곳에서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 걸려 그만 두었고 두 번째의 양복 직종은 장래 기성복이 대세를 잡으면 혼자 하는 점포는 생존의 길이 막막할 것 같아 그리고 명절 때면 2~3일씩 잠 못 자고 일해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만 두었단다.

최종 선택은 이용직종인데 머리 깎는 것은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강점이 있고, 항상 깔끔한 머리에 흰 가운이 멋져 보이고 타 업종보다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였단다. 여기에 적은 밑천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과 내가 가장 쉽고 빠르게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사업은 첫째, 외상이 없고 둘째, 머리는 쉬지 않고 자라니 사계절 돌아가는 장사이고 셋째, 유행을 타지 않는 장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각종 가발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다

첫 기술을 배운 곳은 대전 형제 이발관.
옛날에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경험해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도제 형식으로 주인의 눈치만 볼 뿐 무한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청소부터 머리감는 허드렛일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가위를 들 수 있는 것은 극히 어렵다. 눈치 빠르게 행동하고, 예쁜 짓 골라하고, 잘 보여 최대한 빠르게 배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부지런히 뛰고 노력한 결과 2년 반 만에 면허증을 취득하고 용주이용원으로 옮겨 점원으로 기술을 연마하게 된다. 남의 가게지만 내 가게 이상으로 철저하게 고객 관리를 하게 되자 그 가게 손님 대부분이 나만 찾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 겁니다.

물론 저는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정해 놓고 일을 했습니다. 첫째, 아침에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는다. 그래서 최고의 멋을 내어 손님의 모델이 된다. 둘째, 흰 Y셔츠에 반드시 넥타이를 매고 일을 한다. 그래서 내 직업의 존귀함과 고객서비스의 격을 높인다. 셋째, 일이 끝나면 항상 청소를 철저히 하여 숍의 청결을 유지한다. 어쩌면 이 원칙이 고객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게 되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점원과 사장은 그릇이 다르다

용주이용원에서의 4년간의 점원생활 동안 기술이 늘고 철저한 고객 관리를 통해 단골손님이 늘자 자연 창업을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 점원의 월급은 5만원 이었고 창업을 하면 3만 원 정도의 수입금액이 계산되어 망설일 처지였으나 과감하게 사업을 시작한다. 비록 금액은 적지만 사장은 그릇이 다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21살의 젊은 사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쉴 틈 없이 머리와 인연을 맺으며 점포를 키워 왔습니다. 그리고 1981년 그 당시 남자가 여자 미용을 생각지도 않을 때 저는 미래를 생각하여 미용면허를 취득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국에서 열 번째 이내, 대전 충남에서는 첫 번째 쯤으로 기록 될 것입니다. 이는 남이 하지 않을 때 무언가 시도하여 차별화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동생 장만우(57세, 011-401-6113)도 이용직종으로 함께 합류 1972년 이용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함께 일하게 된다. 1976년 동생과 같이 앞서 말한 미용사 면허증을 같이 취득하고 함께 가발 연구에 몰입하는 데 서로 의지하며 사업을 한 결과 모두가 좋아져 현재 동생 장만우 사장도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상호 서울 가발 박사로 사업을 하고 있다.

가족경영이 성공의 밑거름

“본격적으로 가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2년부터로 우리형제 스스로가 대머리로 해결해야할 과제였기 때문에 밤낮을 쉬지 않고 함께 작업하고 토론하여 제품을 개선하였지요.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자금도 연구비에 몽땅 투자하는 것을 비롯하여 실로 우리 형제의 집념은 남달랐습니다. 여기에 또 한사람의 공노자는 제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가발 박사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후덕한 인상의 조규례(59)여사는 이 말을 듣고 말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다. 조 여사는 현재 매주 지방 출장이 잦은 장사장의 내부 일을 도맡아 하는 부사장이기도 하다.

가족 모두가 이일에 종사하니 고객만족도는 대단히 높다. 방문한 고객 K씨(45세, 충남 서산시 동문동)에 점포를 찾은 이유를 물으니 가발 상담을 위해 나 한사람을 위해 늦은 밤 서산까지 찾아와 상세하게 상담해주는 정성에 감동하여 단골이 되었고 오늘은 가발 관리를 위해 점포를 방문 했다고 한다. 형제가 가발 보급과 개발을 위해 차안에서 잠자며 온 몸으로 뛴 열정의 결과가 오늘에 와서야 조금 빛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 사장의 미소는 고객 친절로 가득하다.

 
오기가 9단인 오뚝이 사장

속내를 조금 훔쳐보니 2번의 큰 실패 속에 오뚝이처럼 일어선 스토리도 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11남매의 처갓집의 다섯째 처남이 자동차(명의 이전을 하지 않고 종합보험도 들지 않음)로 39세의 사람을 치어 50일 후 사망 하는 사고 처리에 그동안 몽땅 모은 재산 다 날리고 새로 시작하는 처지가 되었다. 점포도 처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장만국이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로 옆 건물에 살림방까지 딸린 아주 작은 점포를 얻고 다시 시작하는 투지를 불태웠다. 2년 반 만에 옛 점포를 다시 사서 입점하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한다.

“제가 그때 각오하고 실천 한 것은 걸음을 더 씩씩하게 그리고 힘차게 걷고 더 열심히 고객 서비스를 하여 감동을 주자. 그래야만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앞만 보고 뛰었지요. 그러니까 차츰 주변에서 서서히 이 장만국이를 인정하고 저놈은 반드시 살 놈이라고 하더군요.”

요즈음 젊은이들한테 부탁하고픈 말은 어떠한 경우라도 희망은 반드시 있고 또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가업승계 와 한국이용사회중앙회 회장

서울 가발 박사는 대전역 앞에 위치한다. 점포는 2곳이다. 중동 64-1은 132㎡(40평)규모로 커트룸 3, 상담실, 세척실로 구성되어있다. 이곳은 장만국 사장 부부가 운영의 주체가 되고 정동 26번지의 82.5㎡(25평)은 아들 장성혁(35세)이가 경영한다.

중부대학교 건축학과 졸업한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기위해 많은 고민을 거친 후 남의 점포에서 3년간의 혹독한 훈련과 경험을 한 후 점포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후회 없이 이업에 종사하는 아들이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매진하여 고맙고 또 보람을 갖는다고 한다. 서울 가발 박사는 아들이 신세대 아버지가 구세대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 고객관리를 하는 강점을 갖는다.

이러한 집념과 공로는 자연 이용업계의 귀감이 되어 지난해 지방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한국이용사회 중앙회 회장으로 선출되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돈 보다는 가치를 중히 여기고 변화하는 미래를 대비해 끊임없이 부지런함을 보여주는 장만국 사장.

“광고가 없으면 점포는 죽습니다. 저는 매출 10%를 어김없이 투자 홍보에 진력합니다. 남들은 불황이라 겁을 내지만 저는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뜁니다. 아직은 늙은이 취급은 NO입니다.”

제 정년은 아직도 멀었다고 큰소리치며 오늘도 부산으로 출장 가야 한다며 승용차 키를 찾는 장만국 사장의 표정에서 즐겁게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장만국 : 011-409-2020, 042-222-6666
1999 : 중부대학교 헤어디자인학과 회장 역임
2003 : KBA컵 국제이 미용 경연대회 그랑프리 대상
2007 : (사)한국 이용사회 중앙회 기술 강사
2007 : 대한민국 헤어 기능장
2008 : 서울 이용원(서울 특수 가발)
2011 : 대통령 표창
현재 : 서울가발박사 대표

 
     
 
 

조병무, 경영학 박사, 경영지도사, 소상공인 진흥원 대전 세종 충남 본부장, 대전상의 경영자문위원, 대전세종 충남 사회성 향상 교육 후원회장, 한남대 겸임교수, 저서 : 허리를 굽혀야 돈을 줍는다. 돈버는 길목은 따로 있다. 이메일: dr11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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