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주권의 원천은 '민회'
로마 주권의 원천은 '민회'
  • 임영호
  • 승인 2015.05.12 16: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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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칼럼]로마인 이야기...열린 사고와 개방성 배우게 하는 책

   로마인 이야기에는 동화와 개방을 유도하는 로마제국만의 통치방법이 잘 그려져 있다.
로마제국은 어떻게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듯이 세계 역사 중에서 가장 많이 대중에 오르내리는 것은 로마사이다. ‘로마는 어떻게 오랫동안 로마제국을 유지했으며, 이 로마역사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로마사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에 들어서는 단연 <시오노 나나미>이다.
그의 여러 로마사 관련 책 중에서 <리더를 위한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성공요인을 살펴보았다. 이 책은 분량이 적으면서 강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눈여겨 볼 것은 로마의 정치체제이다.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lus)가 말한바와 같이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것은 정치 체제이다. 오늘날 세계 정치체제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마카아벨리도 <로마사논고>를 통하여 그의 이상적 모델이 바로 로마 공화정임을 강조하였다.

로마는 과두제인 귀족 공화정이다.
우리는 정치체제를 보통 세 가지로 일반화한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로마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세 가지 정치 체제를 혼합한 것 같다. 처음에는 왕이, 다음은 귀족과 시민이, 그리고 말기에는 황제가 주도적이었다.

가장 전성기인 공화정시대에는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세 개의 기관이 있었다. 이는 지도자 2인으로 구성된 집정관, 출신 가문을 따지지 않고 경험과 능력만으로 구성된 원로원, 시민의 집합체인 민회이다. 이 중 가장 핵심은 주권의 원천인 민회이다. 여기에서 공직후보자에 대한 표결권을 가진다. 종신제인 원로원은 군사 및 국정에 관한 경험과 식견을 갖춘 엘리트 집단으로 자문기관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권위에 의하여 정치를 주도 한다. 따라서 로마는 과두제인 귀족 공화정이다.

집정관은 왕을 대신하는 최고의 지위이며, 임기는 1년, 한 달씩 교대근무하며, 2인이 견제하면서 상호 합의하에 업무를 본다.비상시에는 한사람의 집정관에게 전권을 위임하기도 한다.

집정관은 민회의 투표를 거쳐 선출된다. 집정관은 최고 군사령관으로 군단을 지휘하느라 로마에 머무르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로마에 남아있는 법무관이 대신 집행한다. 공화적인 정치체제도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후 로마의 크기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변질된다. 이후에는 원로원과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하는 황제시대로 가지만, 황제는 주권자라기보다는 엄격히 말하면 시민가운데 제1인자에 불과했다.

로마라는 제국에 동화시키는 패자동화정책
어떤 이유로 그 많은 식민지에서 내부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팍스 로마는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루어져야한다. 특히 내부불만을 잠재우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와의 싸움에서 패전하면 그 국가는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로마는 아무리 전쟁에 패한 민족이나 국가라 해도 로마라는 제국에 동화시키는 패자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로마제국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로마시민의 열린 사고와 개방성이 있었다. 개인의 혈통, 문화, 배경, 종교 같은 것은 로마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와 대비되는 그리스 아테네는 부모 모두가 아테네 시민이어야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혈연이 기준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으로 시민권이 있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민족이었으나 아테네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권이 없었다.

로마는 전쟁에서 패배해도 노예로 삼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든든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시민권이라는 매혹적인 혜택이 주어졌다. 로마는 오직 로마를 위하여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중요시 했다. 결국 로마 시민권의 획득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지의 속성이었다.

이에 관련한 클라디우스 황제의 기억나는 연설이 있다.
“스파르타인도 아테네인도 전쟁터에서 그렇게 강했는데 단기간의 번영밖에 누리지 못했다. 그 주요 요인은 과거의 적을 자국 시민과 동화시키지 않고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따돌리는 방식을 계속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층부로 갈 수 있는 개방성과 유동성
로마에서는 계급이 구분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계급 간 유동성이 높았다. 아테네는 시민, 외국인, 노예로 구분되어 보기에는 평등적일지 모르지만 계급 간 유동성이 전혀 없는 폐쇄적 구조였다. 로마는 원로원, 기사, 시민, 속주민, 해방노예, 노예로 계층화되었으나 누구나 상층부로갈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는 개방적 구조이다. 그 예로 원로원 의원의 상당수가 해방노예의 자손이었다. 이같은 로마의 개방성은 다신교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로마는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의 신까지도 자기들의 신으로 섬겼다. 그래서 종교적인 갈등이 없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

로마제국의 속주의 지방자치화
로마제국은 피지배민족에게 로마의 사회조직과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각국의 민족 고유한 특성에 따라 무니키피움(municipium)이라는 지방자치단체를 두고 내부 자치를 허용하였다. 사형이외의 사법상의 자결권과 치안유지 책임도 그들에게 주었고, 오직 식민지 총독만 중앙정부인 황제와 원로원이 임명하였다. 그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안정적인 속주는 원로원이, 그렇지 않은 속주는 황제가 임명하였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에게 로마 정치에 참여할 시민권을 주었고, 그들 중 지도자에게는 원로원 자리까지 할애하였다. 당시 황제 중에는 아랍인도 있었다. 로마제국 이후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이 인도인 간디나 네루에게 영국시민권은 물론 하원의석까지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주민은 총독에게 복종의무가 있다. 그러나 총독의 정치에 불만이 있으면 중앙에 고발할 권리도 있으며, 고발한 속주민과 고발당한 속주총독이 모두 출석하여 수도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다.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우하여 속주민의 불만을 해소하였다.

로마국방의 주 전력은 로마시민
로마제국의 인적 구성은 크게 세가지, 로마시민권 소유자, 동맹국 주민, 속주민이다. 이중 로마국방의 주 전력은 로마시민이다. 로마군은 군단병, 보조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단병은 주력군으로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지원할 수 있다. 특히 가장 막강하고 용맹한 중장보병의 자격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제한하였다. 카르타고의 외국인 용병에게 국방을 맡기는 것과는 판이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며 조선의 양반들과도 다른 점이다.

속주민은 보조군으로 참여한다. 로마군단병과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속주민으로부터 모병으로 제공받아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다.  이는 속주민으로하여금 로마에 대한 동경심과 애국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고, 로마의 군비를 크게 절감시키고, 군사력 또한 크게 상승시켰다. 보조군으로 20년 복무한 후 제대하는 병사들에게는 로마시민권도 주었다. 이외에 자발적으로 로마에 순응한 나라는 동맹국으로 삼아 그 동맹국 주민은 로마가 군사를 일으킬 때 병력을 제공하여 로마제국의 안전보장을 도와주었다.

넓은 세원과 낮은 세율의 간접세 중심
로마의 세제는 간접세가 중심으로 세원이 넓고 세율은 얇은 제도이다. 걷는 세금을 적게 하여 가급적 비용이 들지 않는 방향으로 통치를 하였다. 국가재정을 압박하지 않도록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은 모두 민간에 위탁하는 방식을 고수하였다. 민간의 경제활동을 장려하는 작은 정부의 실현이다.

로마의 주권은 시민권을 가진 시민이며, 이들은 병역의무를 진다. 그래서 피의 세금이라 일컫는다. 국방의무를 이행하는 대신 로마 시민은 직접세를 내지 않는다. 사고파는 물건에 붙는 간접세만 낸다. 이에 반하여 속주민은 직접세인 속주세라는 이름으로 자기수입의 1/10을 낸다. 대신 병역의무는 없다. 이는 속주를 보호해주는 대가인 일종의 안전보장세이다. 물론 보조군으로 근무하면 세금이 면제된다.

이밖에 6촌 이내 친족이 아닌 사람에게 상속하면 상속세를 부과하고, 노예를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면 노예 해방 세를 몸값의 5%정도 부과했다. 이외 간접세로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품목에 관세로 1.5%~5%를 부과하고 사치품에는 25%, 그 밖에 유통하는 물건과 용역에는 1%의 세금을 부과했다.

양극화 해소 위한 복지정책

로마제국은 나름대로 복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로마황제에게는 식량 확보와 안전보장이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 군단병과 보조병에게 거처와 식량과 무기, 급료를 지급했다. 20년 뒤에 만기 제대하는 군인에게는 퇴직금도 주었다.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시칠리아 섬을 양도받은 후부터 이 섬에서 생산한 밀이 주식이 되었고, 소맥법에 따라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당시에도 포퓰리즘이 성행하여, 처음에는 빈민들에게 밀을 시가의 60% 가격으로 배급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무상으로 배급하였으며, 지나치게 확대되었다가 제정시대에는 제한적으로 약 20만 명에게만 30kg을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법률상으로는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계급도 배급받을 수 있었으나 줄을 세워 배급하는 방식 때문에 스스로 기피하게 만들었다. 빛나는 머리싸움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출신지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는 속주세라는 직접세를 면제받는다는 뜻이다. 지식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특전을 주어 자유로운 시장을 만들고, 그 속에서 경쟁하면서 수준을 향상시키고 상대적으로 비용을 적정수준으로 유지하였다.

권력과 부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로마인에게 최고의 명예는 공공사업에 사유재산을 기부하고, 거기에 그 사람의 이름이나 가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아피아 가도, 율리우스 공회당, 클라우디우스 수도, 폼페이우스 극장이 그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투스황제가 인간의 명예욕과 허영심을 적절히 활용한 것으로 로마에서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로마건국 1000년의 역사와 노화
사람이 늙으면 죽듯이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해서 3세기경이 지났으니 1000년이 넘었다. 로마의 멸망 시기는 언제일까? 로마 멸망 시점은 학자마다 다르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1453년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시기로 보는가 하면, 다신교인 로마 문화와 달리 유일신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313년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또 일부는 서로마 제국에 황제로 즉위한 자가 없었던 476년으로 보는가 하면, 이슬람 세력과 싸운 전쟁에서 로마가 수세에 몰린 7세기로 보는 설도 있다.

왜 망했을까? 좋은 정책도 오래 시행하다 보면 부작용이 생겨서 좋은 기능을 오히려 능가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몰락원인은 학자마다 다르고, 그 이유도 그만큼 가지가지이다. 군인들이 황제계승을 좌우함으로써 야기되는 정치적인 혼란, 전제적인 황제에 의한 시민들의 자유 상실과 충성심 결여, 달려드는 모기떼처럼 광범위한 국경선에서 게르만족을 비롯한 야만족의 침입이 주이유가 된다. 이 부분은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쇠망사’를 읽기를 권한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끝으로 이 책을 덮으면서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영원한 강대국도 없고 영원한 약소국도 없다’는 것과 오직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개입을 통한 자율적인 정부’ 상태에서만 영토나 부가 증대되었다는 점, 그리고 강한 것보다는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보다 오래 생존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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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church 2015-05-13 13:02:48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는 쉽게 대중들이 역사를 대할 수 있는 책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단편적이고 편협된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책 속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지금의 아베 정권의 역사적 인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그녀의 극우편향적인 행동에서도 잘 나타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