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은 광활하여 큰 강으로 흐른다
들판은 광활하여 큰 강으로 흐른다
  • 이정우
  • 승인 2015.05.0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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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칼럼]충락(忠樂)의 충신 임난수<4>, 독락정을 노래한 조선후기 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독락정을 노래했듯이 이제는 독락문화제를 통해 세종시민들이 아름다운 정자를 기리고 노래하고 있다.
봄빛이 완연하게 펼쳐지는 5월이 시작되었다. 만 가지 꽃이 사방으로 울창한 만화방창의 계절이다. 독락정에 올라 녹색으로 짙어가는 나무와 흐드러진 꽃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조선후기에 지어진 독락정 관련 시를 음미해 보았다.

조선후기에 독락정을 소재로 시를 처음 지은 사람은 이하곤(李夏坤)이었다. 시가 언제 작성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시의 제목은 ‘동쪽나루를 건너’이다.

동쪽나루를 건너

연기현에 있는 동쪽나루를 건넜다.
나루 위쪽에는 독락정이 있다.
높이 솟아 있어 자못 시원한데, 이곳은 임씨의 소유지이다.

외로운 달은 호서지방 산하를 두루 돌아보며 다니고,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 내 얼굴을 때리곤 다시 서쪽으로 불어 가는데,
다만 외로운 구름만이 나와 동반자 되어 함께 가는 구나
무리 지어 있는 늙은 기러기들은 울음소리를 차마 견디어 내라하고,
저녁에 내린 하얀 눈은 파리한 말을 어서가라 재촉하며,
저녁노을 빛은 홀연히 먼 곳의 밝은 산봉우리로 달아나 버린다.
나그네를 가장 불쌍하게 여긴 것은 독락정 앞의 강물 뿐
그 찬물결은 나의 읊조림 소리를 멀리 실어 보내버리는구나

이 시는 특이하게 서문을 달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 이하곤은 연기현의 나루를 건너면서 독락정을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나루위에 독락정이 있다고 하니, 지금의 금남교 주변이 나루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하곤은 또 독락정의 소유자에 대해서도 분명히 기록을 하였다. 그것이 임씨, 그러니깐 부안임씨의 소유임을 적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하곤이 살았던 시기에도 독락정은 부안임씨의 소유물로 유지되어 관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하곤이 이글을 쓴 절기는 ‘저녁에 내린 눈’ ‘저녁노을’로 미루어 겨울이고, 시간적으로는 ‘저녁노을 빛’ ‘외로운 달’에서 해가지고 달이 떠오르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또 날씨는 ‘바람은 먼지를 일으키며’와 ‘저녁노을 빛’ ‘저녁에 내린 눈’으로 미루어 바람이 불어대고 눈이 내린 맑은 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시는 엄동설한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 저녁 무렵에 지은이가 독락정을 방문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의 저자 이하곤(李夏坤 1677(숙종 3)∼1724(영조 즉위년))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재대(載大), 호는 두타초(頭陀草).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정2품 대제학(大提學)이었던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이다. 1708년(숙종 34) 진사에 올라 정7품직인 세마부수(洗馬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 청주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성격이 곧아 아첨하기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여행하였으며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각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녔다.

   매년 4월 22일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독락문화제. 임난수 장군의 얼을 기린다.
그의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문인으로 화가이자 평론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에 최고시인으로 불리 운 이병연(李秉淵: 1671(현종 12)∼1751(영조 27))과 서예와 문장으로 유명한 윤순(尹淳:1680년(숙종 6)∼1741년(영조 17)), 화가였던 정선(鄭敾: 1676~1759)과 윤두서(尹斗緖: 1668년(현종 9) ∼ 1715년(숙종 41) )와 활발히 교유하였다. 그의 문집 중에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기록, 정선의 여러 그림에 대한 화평, 당대 및 중국의 화가들에 대한 평 등이 있어, 조선후기 그림 평론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 가운데「춘경산수도」(간송미술관 소장)는 복사꽃이 핀 봄날의 풍경을 연두색과 분홍색의 담채를 써서 묘사한 것으로, 필치는 세련되지 않으나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으로 정선의 초기 작품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집으로는 『두타초(頭陀草)』18권이 전한다.

독락정에 관한 두 번째 시를 쓴 사람은 이재(李縡)이다. 이재가 쓴 시는 ‘독락정에 올라’라는 제목의 것이다.

독락정에 올라

새봄은 풀 빛깔이 새롭게 일어나고
들판은 광활하여 큰 강으로 흐른다
평생을 ‘같이 누리는 즐거움’의 그 뜻은
‘홀로 섬’으로 바뀌어 천년의 근심이 되었구나.

이재가 이 시를 쓴 년도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시를 작성한 계절은 시의 내용 ‘새봄의 풀 빛깔’이라고 하는데서 봄철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락정을 노래한 시로서 이글은 다른 시들에 비해서, 임난수 부자의 ‘충(忠)’과 ‘의(義)’ 그리고 ‘홀로 누리는 즐거움(獨樂)’은 오히려 ‘같이 누리는 즐거움(同樂)’으로서가 아니라 ‘홀로 섬(獨立)’으로 승화되었음을 칭송하였다. 곧 임난수 부자의 삶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자연과 더불어 누리는 혼자만의 즐거움인 독락(獨樂)이었지만, 그것은 충과 의를 홀로 지키고자하는 높은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이재(李縡:1680(숙종 6)∼1746(영조 22))는 본관이 우봉(牛峰)이다.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또는 한천(寒泉)이다. 이유겸(李有謙)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이만창(李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20대 초반인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렸으며,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재는 정치적 입장에서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둘째 큰아버지 이만성(李晩成)이 옥사하자 정계를 은퇴하고, 강원도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그러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다시 물러나 경기도 용인의 한천(寒泉:용인시 이동면 천리)에 거주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그의 정치론은 의리론(義理論)이었다. 따라서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 강경론)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 당시에 진행된 학술논쟁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사망 후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도암과시(陶菴科詩)』·『사례편람(四禮便覽)』·『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독락문화제 사생대회에 참가한 초등학생들
작성년도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송환기(宋煥箕)는 독락정을 소재로 ‘독락정에 올라’라는 시를 지었다.

독락정에 올라

독락정의 빈 공간은 나그네가 홀로 즐기고
들 가운데 외로운 언덕은 초록빛 강의 머리로다
(임난수) 장군은 누구와 함께 즐거움을 함께 하였던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가고 머무름을 맡기어 줄지니.

송환기기 지은 ‘독락정에 올라’라는 시는 작성된 계절이 ‘초록빛’이 물든 시기로 봄에서 여름의 시기였다. 적어도 가을이나 겨울은 아니었다. 또 송환기는 임난수 장군이 즐긴 ‘홀로 누리는 즐거움’으로서 건립한 독락정은, 길을 가는 나그네가 이곳에서 쉬고 머물다 기운을 내서 다시 가는 즐거움으로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의 궁극전인 뜻은 앞의 이재의 시에서 표현한 것과 같은 뜻으로 독락정(獨樂亭)은 임난수 장군 혼자만 누리는 즐거움인 독락(獨樂)에서 만인과 더불어 누리는 동락(同樂)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찬탄하는 것이다.

송환기(宋煥箕: 1728(영조 4)∼1807(순조 7))는 본관이 은진(恩津)이다.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 또는 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형이상학의 철학으로『태극도설』·『역학계몽』·『가례』 등을 배웠다. 1766년(영조 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년(정조 23)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시헌부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예조참판, 1808년 공조판서, 1811년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당시 인간과 동물의 심성(心性)의 차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한 호락논쟁에서, 한원진(韓元震)이 주장한 호론을 지지하였다. 그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임헌회(任憲晦)도 분명하지 않은 어느 시기에 독락정에 관련된 일련의 시 몇 수를 지었다. 그 시들의 제목은 ‘독락정에 올라’이다.

독락정에 올라

1)
강 빛깔과 산 색깔은 모두 푸른빛을 띠었고
멋스럽게 즐기던 풍류는 오백년이 되었구나.
여러 온갖 일들 중에 자손이 좋아함과 같음이 없거늘
옛날이나 지금의 정자 중에 평평하게 흐르는 강을 접한 곳이 몇이던가?

2)
장군의 뜻과 절개는 홀로 뛰어났으니
자신의 모습을 지워 숨기며 은자로 산지 16년
신령스런 땅기운을 제압한 뛰어난 인재가 있으니
예사스러운 곳이라는 독락정은 어떤 곳인가? 은자의 정원이 아니로다.

첫 번째 시가 작성된 계절은 ‘푸른빛’이니 봄이거나 여름이다. 또 ‘풍류는 5백년’이라고 하여 독락정은 건립된 이후로 5백년을 지속하여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여러 일들 중에 자손이 좋아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는데, 독락정은 자손들이 좋아하니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또 정자가 위치한 곳에 강물이 흐르는 곳이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독락장이 제일이라고 평가하였다.

   독락문화제 광경
두 번째 시는 임난수 장군의 삶과 관련한 그 추모의 성격이 짙은 시이다. 임난수 장군이
절개를 지키며 은자로 16년을 살았으니, 그가 산 독락정은 신령스러운 땅기운마저 제압한 곳이라고 하였다. 역으로 이곳에 건립된 독락정은 단순히 은자의 정원만이 아니라 신령스런 땅이고 예사스러운 곳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임헌회(任憲晦: 1811(순조 11)∼1876(고종 13))는 본관이 풍천(豊川)이다. 자는 명로(明老)이고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 또는 희양재(希陽齋)가 있다. 아버지는 임천모(任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익화(洪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5년(고종2) 호조참의가 되었는데, 이해에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고종은 그를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사망 후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현재의 덕성서원(德星書院) : 세종시 도담동, 도담고등학교 안쪽, 구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문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이상으로 조선초기부터 조선후기까지 독락정과 관련된 시들을 몇 차례에 걸쳐서 살펴보았다. 시의 내용과 표현은 작가에 따라 또 시절에 따라 달랐지만, 공통된 것은 독락정의 경관에 대한 칭송과 임난수 장군의 충의에 대한 경애였다.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굳은 의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보고 칭송하는 소중한 가치인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도 세월이 흘러 7백년 뒤, 또 그 뒤로 8백년이 지난 뒤에도 독락정과 금강 그리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함께 임난수 장군의 절의정신이 전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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