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멀어 아득한 산하의 먼 밖이여
멀고 멀어 아득한 산하의 먼 밖이여
  • 이정우
  • 승인 2015.03.1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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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칼럼]충락(忠樂)의 충신 임난수<3>, 독락정을 노래한 옛 글

   고고함이 배어 있는 독락정은 옛 시인묵객들의 좋은 글재가 되었다.
이제 꽃샘추위도 지나고 완연한 봄의 향연이 시작되는 그 모두에 있다. 산과 들로 봄을 누리는 사람들이 봄꽃과 더불어 한 시절을 공유할 것이니, 봄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계절임에 분명하다. 이럴 즈음 금강변의 독락정을 글제로 시를 쓴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글은 지난번 ‘충락(忠樂)의 충신 임난수’와 이어지는 글이다. 아울러 필자가 제시한 시들은 원래 한시이다. 그런데 필자가 한글로 번역해서 그 원래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 스스로의 실력을 의심해 본다. 그저 필자는 독락정과 관련된 인물과 그들이 작성한 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작은 시도이니, 독자 제현은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 올린다.

16~17세기 사림이 성장하고 그 후배들이 활동한 시기, 금강 독락정에 관련된 시를 쓴 사람으로 확인된 이와 작품으로는 어촌 심언광이 시 3수, 둔헌 이홍유가 시 2수, 죽당 신유가 시 2수, 초암 신혼이 시 1수가 있다. 어촌 심언광(1487(성종 18)∼1540(중종 35)은 자신의 저술 『어촌집(漁村集)』에 「공주독락정을 노래함」과「독락정」그리고 「독락정의 봄놀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 가운데 먼저 「공주 독락정을 노래함」을 보자.

공주 독락정을 노래함   

강바닥에 자리 깔고 앉노니 틀림없이 융단은 아니구나.
술 마시고 바람 맞으며 옛 선인에게 술 한잔 부으니
전설의 황학 나그네가 이미 왔다 간 것이 슬프구나.
푸른 누각 붉은 벽에 지나간 선현 쫓아 시를 써본다.
넓고 멀어 아득한 산하의 먼 밖이여
시의 서정 우주멀리 덮어버리는 구나.
큰 붓 들어 조화 부려보는 것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새로운 글에 다 담는다.
산골짜기 언덕 아슬하게 높은 정자는 임군(林君))을 생각하고
천천히 걷는 걸음은 서서히 한 골짜기에 걸린 구름 밟는다.
젊은 나이에 드날린 이름은 역사책에 머물고
늙은 날의 벼슬아치 예복은 영광스런 공훈으로 보답하네.
속된 마음이나 세속적인 생각은 큰 강물 주어 씻어버리고
마음의 일일랑 흐트려서 흰물새가 논하게 맡겨버리세.
사람은 가고 정자는 비어 나 홀로 있고
정자에 이르던 지난날의 묵은 자취 남겨진 글로 느껴본다.
금강물 서쪽으로 흐르고 해는 져서 낮게 자리하니
향기로운 풀이 물가를 막아 객의 마음 헷갈리네.
눈으로 우주를 끝없이 바라보다 저녁 무렵 조용히 돌아오니
붓으로 공중 속의 기운 적어 글제로 들게 한다.
오랜 세월 변함없는 산천은 소동파의 적벽부고
물과 돌로 이뤄진 경관은 유종원의 우계로다.
언덕 가장자리 느리게 느리게 걷은 푸른 당나귀
짝지어 능숙하게 엉켜 돌아오니 작고 좁은 길임을 알겠구나.
옛날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양양부사(필자: 임후)가 되었고, 관직을 그만두고 정자를 지었는데, 이름이 독락이라고 하였다. 이 정자가 바로 그 정자다. 금강을 구부정하게 내려 보는데 기묘한 경치가 호서지방에서 으뜸이더라.

   옆에서 본 독락정 현판
심언광의 이 「공주 독락정을 노래함」이란 시가 언제 작성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심언광이 어느 때인가 독락정에 와서 달성 서공이란 사람과 같이 노닐다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는 말미에 부언을 달았다. 그 내용을 보면 독락정이라 이름 한 사람은 임후란 점이다. 또 독락정은 물가를 금강의 물을 바로 내려 보는 위치에 있는데 그 경관이 당시 충청도에서 최고였다는 것이다. 심언광은 이시 외에 금강의 독락정과 관련이 있는 「독락정」과 「독락정의 봄놀이」라는 제목의 시 2수를 더 지었다.

독락정

앞 뒤 동산과 정자에서 홀로의 즐거움을 누리던 사람들
모두 다 구릉과 골짜기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 되었구나.
세상의 명성을 쫒고 또 쫓음이 나의 병만은 아니건만
바쁘게 살아가는 이내 신세 누가 감히 나를 기억하리.

독락정의 봄놀이

예전에 동쪽바람은 물가를 굽어 돌았고
작은 정자의 소나무 난간은 들쭉날쭉 하여 풋풋하네.
봄은 병 난 사람을 다스리고, 향기로운 풀을 차례로 피게 하며
꽃은 수심 어린 사람 마음 빌려 그 근심 접어 올리게 하는구나.
술 마시는 사람은 천일을 취하려 생각하니
공을 세워 이름 날림은 십년의 어리석음이라.
좋은 시절 성대한 모임이 많고 적고라도
젊은 화려함을 말년까지 짊어지지 말지니.

심언광(沈彦光)은 본관이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烱), 호는 어촌(漁村)이다. 사정(司正) 심충보(沈忠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심문계(沈文桂)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심준(沈濬)이며, 어머니는 사직 김보연(金普淵)의 딸이다. 찬성 심언경(沈彦慶)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그 뒤 글재주로 이름을 날려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홍문관교리·집의(執義) 등의 고속으로 크게 출세할 수 있는 자리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서 형 심언경과 함께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적극 주장하고 이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김안로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조직을 만들어 사림파 인물을 모함하자, 비로소 지난 날 자신의 추천행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안로는 자신의 외손녀를 동궁비로 삼으려 하였는데 심언광은 이를 비판하였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되었다. 15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안로의 비행을 비판하자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김안로와 그 일당이 축출되자, 우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심언광도 김안로 등의 인물이 이른바 정유삼흉(丁酉三凶:필자주 정유년의 김안로 등의 일당)이 축출된 이후, 그 자신도 삼흉에 드나들었다 하여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지목되어 불행이 밀려왔다. 대간이 1537년(중종32) 12월 초부터 ‘서용하지 말기’를 주장하면서 조정에서의 자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이 심언광이 ‘뛰어난 재주는 있으나 사특함은 없다’는 영의정 윤은보(1468(세조 14)∼1544(중종 39))와 우의정 홍언필(1476(성종 7)∼1549(명종 4)) 등의 두둔이 있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1538년(중종33) 2월 20일 그를 두둔했던 윤은보와 홍언필이 “세상의 물정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짐에 따라 공론이 답답해하고 있으니 심언광이 파직되지 않음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파직시키고 고신(告身: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 을 회수하도록 하라”고 청하게 되었다.

우의정 김극성(1474(성종 5)∼1540(중종 35))도 심언광 등의 인물이 “그 종말에는 김안로와 결별하여 용서할 만한 일이 있었으나 삼흉의 발단은 실로 이 사람에게서 연유하였으니 그 죄야말로 숨길 수 없다”고 하여 파직을 청하였고 결국 이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다음날 고신까지 회수되게 되었다.

   서거정이 쓴 독락정 시, 정자 한 편에 붙어 있다.
이렇게 파직되고 고신까지 회수된 몇 일 뒤 심언광은 한양성문을 나와 낙향했고, 바로 「독락정」과 「독락정의 봄놀이」라는 두수의 시를 남겼다. 조정에서 파직이 확정된 것은 2월 20일이고, 이 시들이 작성되었다고 기록된 날짜는 2월 24일다. 심언광은 관직이 삭탈된지 4일만 에 한양성을 떠나 금강 독락정에 도착해서 직접 경관을 보고 작성한 진경작시(眞景作詩)이다. 시가 작성된 날로 표기된 일자인 음력 1538년 2월 20일은 양력으로 1538년 3월 24일이다. 이 시기라면 강변의 일조량이 좋은 독락정에는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더라도 개나리꽃은 필 때이다. 따라서 시간의 시점이나 시의 제목이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언광은 「독락정」이라는 시에서 세상 삶의 덧없음을 ‘티끌’로 노래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을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심중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것이 어쩌면 김안로와 관련된 자신의 정치적 부침과 뒤이은 조정에서의 축출을 근심하고 걱정한 데서 온 것이 아니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도 사람 사이에서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는가 보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나 방송·연예 등 대중을 상대로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인구에 회자되어야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들의 말속에서 오르내려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존재감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현대의 일만이 아니라 이미 470여년 전에도 그 시대를 살다간 심언광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인기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보다.

심언광은 「독락정의 봄놀이」 이란 시에서 ‘봄은 대자연의 풀을 피어나게 할 뿐 아니라 병난 사람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고 찬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좋은 시절과 젊은 시절의 화려함은 나이 들어 인생이 접어들 시기인 말년까지는 짊어지지 말자고 했다. 곧 그것은 짊어지고 갈수 없는 것임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성취주의와 공명주의를 비판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장악하여 권세가와 함께 세상을 휘몰아 쳤으나, 결국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으니 말이다. 곧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세상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이다.

심언광보다 50여년 뒤의 사람으로 둔헌 이홍유 (1588(선조 21)∼1671(현종 12))도 독락정에 관한 2수의 글을 남겼다. 그는 『둔헌집(遯軒集)』이란 자신의 책 속에 「독락정에 올라」와 「독락정에 위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독락정에서 본 금강교
독락정에 올라

가파른 곳에 지어진 집은 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고
온산 소나무와 계수나무는 가장 푸름이 깊으니
물가마을 임하지사(林下之士)로 살며 숨어 지낼 것 기약한다.
낚시질하는 높고 낮은 바위는 언덕 끝 잘라 낭떠러지 되고
난간에 의지하여 붉게 물든 여뀌꽃 언덕 마주하며
창문 열어 흰 새 나는 물가 멀리 바라본다.
나그네 서글픈 감정 저 맘데로 품으니
독락은 하루의 근심을 날려버리라고 가르친다.
강을 베고 누운 높은 누각은 단청이 빛나니
이곳이 임공(林公)의 독락정 이로다.
넓고 아득한 긴 물결은 달빛 빼앗아 비추고
가파른 바위는 구릉 위에 늘어서 푸른 병풍 쌓는다.
경치나 달빛은 그 옛날의 빛을 내고
땅 형세나 산 모양은 지난날의 모양이다.
어디서 피리소리 들려 나그네의 응어리진 한을 더하니
가을밤 난간 의지하여 그 소리 더욱 듣지 못하겠구나.

독락정에 위에서

정자의 붉은 난간 돌이 언덕 가에 어렴풋하니
만들어진 이 정자 몇 년이나 되었나 물어 본다.
들판을 나눠 굽이도는 물은 본래처럼 가로지르고
하늘가 계룡산은 푸른 연꽃으로 피었구나.
물 가장자리 아름다운 벽은 나그네 발길 머물게 하고
뜰을 범한 먼 길 나그네는 신선처럼 날아오르는 구나.
그 자리에 선 나도 역시 돌아갈 길 잊어 버리니
이슬 맞은 풀과 고독한 이 신세는 함께 피어오른다.
눈여겨 본 땅 이미 유람했으니 얼마나 뒤에 다시 올까.
오늘 올라 온 것 평범함을 한탄한다.
봄 빛깔 무르익어 정자 쓸쓸하고
마을도 고요하고 저녁 새소리도 지는 구나.
어지러이 자란 대나무와 피다 진 꽃은 그 모습 다함없고
강 바람과 물가의 달에 푸르름이 남아 있네.
난간에 몸 기대니 많은 감정 점점 더해져
일부러 새로운 시 지어 내 여정길에 써보누나.

이홍유(李弘有)는 본관이 경주(慶州). 호는 돈헌(遯軒)이다.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역학(易學)으로 이름이 높았던 괴산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이며, 어머니는 옥구장씨(沃溝張氏)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장징(張徵)의 딸이다. 청주(淸州)가 세거지(世居地)이다. 그는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송시열(宋時烈)과도 교유를 가졌다. 1615년(광해 7) 성균(成均)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1644년(인조 22) 57세 때 비로소 성현(省峴) 찰방(察訪)에 부임하였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하였다. 60세 이후로는 청주지방 사족들에 의해 청주지방 학교시설의 가장 높은 선생님(도훈장(都訓長))· 산장(山長 : 서원의 책임자이며 지역 유림의 대표인물)에 추천되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 홍유가 독락정과 관련한 시를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절적으로 「독락정에 올라」의 시가 작성된 절기는 시속에 등장하는 붉은 여귀꽃(紅蓼)으로 미루어 가을이 물들어 가고 있는 때임을 알 수 있다. 여귀꽃은 가을에 피는 꽃으로 강 언덕이나 길 섶에 숱하게 지천으로 피어난다. 수분이 조금만 있어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꽃의 색은 구지 붉은 색은 아니고 따지자면 홍보라 색이다. 낱개로 있을 때는 왠지 청초해 보이나 무더기로 있을 때는 경관이 화려하다. 여귀꽃은 또 고마운 식물이다. 흉년이 들었을 때 기근을 이기기 위해 여귀꽃 열매를 빻아 물에 담궈 독을 뺀 뒤 남은 전분을 먹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그냥 여귀꽃이라 했지만 구황식물로 부를 때는 삼화실이라고 하여 엄연히 곡물열매로서 대접했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때 고구마와 감자가 들어와서 구황식물 내지 보조식물로 자리메김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청자의 도안으로도 여귀꽃이 그려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또 여귀는 씁쓸하고 톡 쏘는 맛의 탄닌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어업도구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도랑이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이용되기도 했다. 이것을 찧어 뭉개 진액을 내어 물속에 담가두면 물고기들이 그 물이 독해서 기절해 떠오르고 그때 물고기를 잡았던 것이다. 따라서 여귀꽃은 우리네 삶과 친근한 식물이다.

여귀꽃을 노래한 사람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인은 고려시대의 이규보와 조선시대의 윤선도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규보는 「여귀꽃 핀 언덕으로 날아든 백로를 보고」라는 시에서 ‘여귀꽃 핀 언덕으로 백로 도로 날아가 앉았네’라는 구절을 지었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가을 편에서 ‘흰마름꽃과 붉은여귀꽃(白頻紅蓼) 나는 곳마다 경치가 좋다’고 하였다. 따라서 백로와 여귀꽃, 흰마름꽃은 깊은 가을을 상징하는 우리내 정서언어인 셈이다.

「독락정에 올라」가 가을에 쓴 시라면, 「독락정에 위에서」는 봄에 쓴 시이다. 시 가운데 ‘봄빛깔(春色)’이라는 용어가 나와서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은 해가지는 무렵이다. 시속에 나오는 ‘저녁 새소리(暮鳥聲)’와 ‘물가의 달(渚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시는 해가지고 저녁이 들어오며 달이 뜨는 시간에 작성된 시임을 알 수 있다. 또 작성된 시절이 봄 중에서도 ‘어지러이 자란 대나무와 피다 진 꽃(亂竹殘花)’에서 만춘(晩春)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전서체가 잘 어울리는 현판
일반적으로 대나무 중에서도 왕대(고죽)는 보통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까지 죽순이 나고, 담죽(솜대)은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난다. 그러므로 죽순이 자라서 대나무가 되는 시기는 5월에서 6월 하순인 셈이다. 따라서 이 시는 늦은 봄에 작성된 것이 확실하다. 지금도 독락정 뒤의 기호서사 주변의 언덕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대나무는 이홍유가 시를 쓰던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있어왔단 말인가?

신유(1610(광해군 2)∼1665(현종 6))도 분명하지 않은 어느 시기에 독락정과 관련된 두편의 시를 지어 자신의 저술 『죽당집(竹堂集)』에 남겼다. 「동락정에서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다」와 「독락정」이란 제목의 시이다.

동락정에서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다

삼일동안 빈 창고에서 예상(翳桑)을 대하니
겸연쩍어 흰 머리결 손톱 긁으니 근심만 남더군.
오늘 아침 작은 배에 올라 물을 저어 가서
독락정 앞에 술자리 마련하고 시를 읊는다.


독락정

물은 세 갈레로 합쳐지고
정자에는 홀로 즐김이 남아 있네.
들은 평평하고 산은 솟은 형세며
강에 넓은 돌이 포개어 서리었구나.
해질녁 어선은 모이고
차가운 강 모래 벌에 기러기 진을 치고 울어대며
군자에게 날로날로 발전하라 하니
정자 끝에서 나의 재질을 근심하고 원망한다.

신유(申濡)는 본관이 고령(高靈).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이옹(泥翁)이다. 첨지중추부사 신말주(申末舟; 1429년(세종 11) ∼ 1503년(연산군 9) 필자주: 신숙주의 동생)의 7대손이며, 신언식(申彦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염(申淰)이고, 아버지는 신기한(申起漢)이며, 어머니는 김영국(金英國)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6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42년에 이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집의(執義)·동부승지·우승지 등을 거쳐, 1650년(효종 1)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사간을 거쳐 165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1년(현종 2)에 형조참판이 되었고, 이어 호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신유가 지은 「동락정에서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다」라는 작품은 머리에 ‘동쪽창고를 열어 진휼한 후 독락정에서 배를 타고 강 아래로 내려갔다. 일절 즉석에서 시를 씨고 읊었다’ 라고 하는 서언을 달았다. 이것을 보면, 독락정 주변의 백성에 대한 구휼작업이 있었고 그 일을 마친 후, 신유가 독락정에 와서 시를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시속에 ‘예상’이 있어 구휼을 받은 사람들이 신유 본인에게 감사를 드렸거나 은혜를 갚는 등의 행위를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이 쑥스러웠던지 그러한 내용을 시속에 담은 것 같다. 위정자로서, 목민관으로서의 어진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시가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성된 시간은 작품 속의 ‘오늘 아침 작은 배에 올라’로 미루어 아침부터 오전사이로 생각된다.

신유가 독락정과 관련하여 지은 또 다른 작품인「독락정」이라는 시 역시 언제 지어졌지알 수 없다. 그러나 시 속에 등장하는 ‘차가운 강모래 벌의 기러기(寒沙鴈)’라는 대목에서 절기는 늦가을에서 겨울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작성된 시간은 ‘해질녁(落日)’이라고 하여 저녁노을이 지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독락정」이란 시는 독락정이 위치한 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기도 한 작품이다.

   전면에서 본 독락정
신유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초암 신혼(1624년(인조 2)∼1656년(효종 7))이 있다. 신혼은 독락정과 관련한 시 1수를 자신의 저술인『초암집(初菴集)』에 남겼다. 이 시의 제목은 ‘독락정」이다.

독락정

좁고 외로운 길에 정자 멀리 있네.
여울물 돌아 높은 언덕 이지러지고
조각구름은 늦은 저녁물가에 걸리었네.
남은 햇빛 가을 거룻배 여운으로 들어오고
바라보며 그 자취 남음 함께하니
정자에 오른 우리를 돌려 보내는구나.
바위사이 작은 구멍 있어
이곳에서 강물 바라보길 시작하네.

신혼(申混)은 본관이 고령(高靈). 자는 원택(元澤), 호는 초암(初庵, 草庵)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화가이다. 증조부는 신언식(申彦湜)이고, 조부는 신심(申淰)이고, 부는 신기한(申起漢)이다. 외조부는 김영국(金英國)이고, 처부는 정세규(鄭世規)이다.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여 1650년(효종 1) 봉교(奉敎), 정언(正言)을 지냈다. 1653년(효종 4) 수찬(修撰)을 역임한 뒤 1654년(효종 5)에 안주교수(安州敎授), 1656년(효종 7)에 부교리가 되었다. 문명(文名)이 높았고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초암집(初菴集)』이 있다.

신혼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시를 지은 절기는 시속에 ‘가을 거룻배(秋舠)’가 등장하고 있어 가을에 작성된 시임을 알 수 있다. 또 시간적으로는 ‘저녁물가’를 통해서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오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독락정과 관련된 신혼의 다른 시나 글이 없어 그와 독락정과의 관련된 내용을 더 파악해 볼 수 없다. 그러나 시에서 묘사하는 독락정의 모습을 볼 때 당시에 독락정 주변에 바위가 많았던 모양이다. 현재의 모습과는 좀 비교되는 모습이다. 세월이 지나는 사이 홍수와 물줄기의 변화로 퇴적되고 침식된 모습이 달라진 것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16~17세기(조선중기)에 독락정과 관련된 시는 독락정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함과 함께 당시 현실을 살아간 선비들의 고뇌가 감정이입 되어 작성되었다. 봄빛 오르기 시작한 나무들과 아련한 강을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옛사람이 노래한 독락정의 경관과 그들의 고뇌를 우리는 어떻게 다시 노래해야 할까? 또 독락정 자체를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시켜야 할까? 새봄을 맞아 독락정을 노래한 글을 읆조리며 그 방향을 모색하면 어떠할까? 선인들의 풍류와 무위의 자연이 주는 제멋대로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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