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세종 흔적 널려 있어
곳곳에 세종 흔적 널려 있어
  • 임영수
  • 승인 2012.01.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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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칼럼]<2>충신 김종서,박팽년, 성삼문을 만나다

재영 : 세종대왕께서 우리 조상에게 특별한 상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아빠 : 우리조상뿐 아니라 세종시에는 세종이 총애하는 신하들 또한 많이 있단다. 사육신중의 한명인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은 집현전 학사로 많은 편찬 사업을 하였지. 그런데 박팽년이 살았던 본가가 바로 세종대왕의 눈병을 고친 전의면 관정리였어.

   성삼문

박팽년이 살 때에는 이곳을 박동(朴洞)이라 불렀으며 아버지의 형제가 윗마을 아랫마을에 살자 상대부, 중대부, 하대부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하대부를 취촌(醉村)이라 부르는 것은 박팽년의 호가 취금헌 (醉琴軒)에서 붙여진 이름이지

박팽년이 전의에 살게 된 것은 할아버지 박안생(朴安生)이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가와 가까운 이곳에 살게 되었어 그는 세종 때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냈으며 중대부에는 한석정(寒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지 한석정이란 이름은 박안생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야.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은 세종때 집현전이 설치되자 학행과 덕행으로 뽑혀 들어갔으며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등이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지. 세종대왕 때에는 사간원 좌사관,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우승지. 공조참의. 병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어.

「세종실록」찬술에도 참여 하신 분으로 아들 박팽년과 함께 단종복위에 노력하다 김질(金礩)의 밀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자 능지처참을 당하였어. 그러니 전의 박동은 박팽년의 할아버지인 박안생과 아버지 박중림 등 세종 때의 역사인물이 대거 살던 곳이지.

중국 13번이나 다녀온 성삼문 사당 자리한 금남면 달전리는 사당 '문절사'가 있는 곳

그뿐이랴 금강건너 금남면 달전리에는 세종대왕 때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에 13번이나 다녀온 성삼문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지. 이곳에 성삼문 선생의 사당이 세워지게 된 것은 성삼문 선생의 당숙인 성희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세조는 성희에게 한양 밖300리에 살라 명을 내렸고 그러기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의 아들 성담수는 생육신으로 유명하신 분이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오기에 성삼문 선생의 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문절사(文節司)라고 부르고 있지.

세종대왕이 총애하던 인물 중 김종서장군 만큼 신임을 얻은 이도 드물 것이야. 김종서장군은 우리의 영토를 오늘날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립한 인물이지. 여진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하였고 문·무를 겸비하신 분으로 세종은 눈을 감으며 김종서에게 아들 문종을 부탁할 정도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묘가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밤실에 자리 잡고 있어 세종시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어.

또 한분 세종이 백성을 위하여 민본정치를 펼 때 세종과 같은 해 태어난 왕자 덕천군(德泉君1397~1465)은 조선 제 2대 왕인 정종의 열 번째 왕자로 그의 묘와 사당이 공주시 의당면에 있어. 그런데 사당이 원래는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었는데 1739년(영조15년) 에 건물이 낡아 공주로 옮기게 되었어.

세종과 같은 나이인 덕천군이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살면서 왕자의 신분인데도 나가 농사일을 하였지. 가난한 이웃을 지성으로 도왔어. 그래서 농민들은 그를 잘 따랐고 이러한 생활을 하는 내용을 들은 세종은 덕천군을 자랑스러워하였지.

어느 해 여름 홍수로 금강물이 범람하여 현재 행정중심복합도시내의 사람 수 백 명이 이재민이 되자 이를 구제 하였기에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렀으며 훗날 덕천군(德泉君)이 되었지.

세종임금께 어필과 궤장을 받은 이도 있어.
전의에 살았던 전의이씨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정종 2년에 공주목사가 되어 고려말 절의(節義)를 지킨 포은(圃隱), 목은(牧隱)치은(治隱)을 배향하는 삼은각(三隱閣)을 계룡산 동학사 경내에 준공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다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늙으신 어머님을 극진히 봉양하였어.

   문절사

이정간이 80세일 때 어머니는 100살이 넘었는데 집에 오면 어린 때때옷으로 갈아입고 노모 앞에서 병아리를 가지고 재롱을 부르며, 즐겁게 하자 천고의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했지. 세종임금께서는 그에게 궤장(几杖-의자와 지팡이를 내림)을 내리고 효행을 포장하는 교서를 내렸지. 이정간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세종임금이 친히 문병하시어 어필(御筆-임금이 직접 써 준 글씨)을 하사(下賜)하셨는데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의 8자를 써주어 지금도 전의이씨 문중의 가훈으로 내려오고 있지.

세종대왕으로 부터 어필과 궤장을 받은 전의 이씨 이정간 흔적도 역력

사람들은 행정중심복합도시 이름을 「세종(世宗)」이라 지었다고 하자 조선 4대 왕의 이름이요, 한글창제로 성군이라 불리며, 만원 지폐에 그려져 있고,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는 인물이기에 붙여 놓은 이름으로 인식하겠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이곳에는 세종대왕과 연관된 인연이 많고 성군으로서의 세종대왕이 되게끔 한곳이 이곳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야.

재영 : 아빠 말씀을 듣고 보니 세종대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친구들에게 자랑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부터는 세종시가 건립되고 있는 연기군 남면, 동면, 금남면과 공주시 장기면의 일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재영 : 긴장이 되요. 우리 연기군 이지만 처음 가보는 곳이 많거든요. 더군다나 아빠와 같이 떠나니 기쁘기도 해요.

아빠 : 그래, 내일부터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추진 중에 있는 마을을 꼼꼼하게 돌아보자.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마을이 있으면 말하렴.

재영 : 양화리를 제일 먼저 가보고 싶어요. 우리 부안임씨 전서공파의 시조께서 처음 살았던 곳이라면서요?

아빠 : 그래, 우리나라 전국에 부안임씨 전서공파 종인이 60만 명이 살고 있지.

재영 : 그렇게 많이 살고 있어요?

아빠 : 내일부터는 마을을 돌면서 자세히 설명하여 줄 테니 오늘은 일찍 자거라.

재영 : 네.

   임난수 장군이 심은 은행나무

첫째날 - 양화리(陽化里)

양화리는 옛날 양화부곡(良化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시대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연기현(燕岐縣)에 속했으며, 고려 현종 때 청주(淸州)에 속하였다가 조선전기(1414년)에는 전의와 연기가 합쳐진 전기현(全岐縣)에 속했다가 1416년 다시 환원된 연기현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암리(元岩里), 학천리, 월룡리, 내산리, 평촌리와 공주군의 이웃마을 일부를 병합하여 양화리(陽化里)라 하여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양화리는 양화부곡에서 따온 이름이다.

양화리 입구에 위치한 숭모각, 임난수 장군을 모시는 곳으로 전월산에 얽힌 얘기 많아

현재 양화리는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1리는 세거리가 중심 마을이고 7반까지 나누어져 있다. 2리는 가학이 중심 마을이고 6반까지 있다. 3리는 평촌이 중심 마을이면서 1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서쪽으로 전월산(轉月山)이 있다하여 이곳도 월산(月山)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남면에 속하게 하였다. 아침 일찍 연기군 남면 양화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재영이는 기대가 되는지 빨리 가자고 서둘렀다.

양화리는 대부분의 주민이 부안임씨 성을 가졌다. 이는 임난수가 처음 정착한 곳이며, 그의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 성씨가 650년 동안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오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부안임씨 전서공파 후손들은 연기군 남면의 양화리, 진의리, 월산리, 송담리에 가장 많이 살고 주변 마을에도 많이 살고 있다.

양화리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전월산이 바라보이는 숭모각이다.
숭모각 앞에는 육중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재영 : 아빠, 이 은행나무는 언제 누가 심었어요?

아빠 : 이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 우리의 조상이신 임난수(林蘭秀)장군이 심은 것이지. 임난수 장군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벼슬은 처음 흥복도감록사(興福都監錄事)를 제수받고 낭장(郎將), 호군(護軍), 우윤(右尹)등 11관직을 제수 받았으며 마지막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어. 공조전서의 벼슬은 오늘날 건설부장관과 같은 직급이지.

임난수 장군이 32세 되던 해 최영장군과 같이 탐라국(현, 제주도)을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당시 전투를 하다 오른 팔이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계속 싸워 승리하게 되었지.

   임흥의 묘

재영 : 그런데 왜 벼슬을 그만 두었지요?

아빠 :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임난수 장군은 고려와 조선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절개를 지켰는데 이를 불사이군(不事二君-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이라하지.

임난수 장군은 고향인 전라도(全羅道)부안(扶安)으로 가기 위하여 금강을 따라가다 전월산을 바라보니 마치 산의 모양이 임(林)자와 같이 생겨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이곳에 와서 집 앞에 심은 나무가 바로 이 은행나무야. 장정 둘이 양팔을 벌려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암, 수 두 그루인데 이곳에서 650년을 살아 왔단다.

재영 : 그럼, 이 나무의 나이가 650살이겠네요?

아빠 : 그래, 오랜 세월 살아오다 보니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데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 마다 나무가 울음소리를 냈다는 것이야.특히, 일제시대 일인들이 이 나무를 베어 가려고 톱을 대자 나무가 갑자기 흔들리면서 윙윙 소리를 내어 나무를 자르려고 했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했다는 일화가 있단다. 이렇게 오래된 나무에는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어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겠지.

재영 : 이곳을 숭모각이라 부른다는데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아빠 : 이곳 숭모각은 임난수 장군이 이곳에 은거하여 살던 곳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지. 이곳 사당을 임씨가묘(林氏家廟)라 부르는데 이는 세종대왕께서 고려의 장군으로 조선에 벼슬을 하지 않은 충절을 높이 사서 임난수 장군을 정몽주나 길재처럼 그의 정신을 높이 대하셨으며 임난수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사패급복(賜牌給復 - 땅을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시켜 줌)을 내렸지. 이때 내린 사패지는 오늘날의 연기군 남면 나성리를 중심으로 진의리, 양화리 일대 이므로 바로 세종시가 들어서는 지역이야.

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지위의 사당으로 세종대왕이 어명내려

세종대왕은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에게 임씨 사당에 붙일 현판을 써서 내리도록 하였는데 이를 임씨가묘(林氏家廟)라 써서 내렸으며 불천지위(不遷之位 - 변함없이 지내는 제사)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지. 불천지위란 사당을 만들고 영원히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으로 세종대왕은 청양 현감인 김미(金敉)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시어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하겠어.

그러니 처음에는 이곳이 임난수 장군이 살던 곳이요. 죽어서는 그의 사당이 있었는데 1868년(고종 5년)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나성리에 있는 기호서사가 없어지게 되자 이곳에 있는 신주와 현판을 그곳으로 옮겨 사당인 것처럼 하여 건물이 헐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하게 되었지.

재영 : 그 후 이곳은 어떻게 되었나요?

   숭모각을 참배하는 안동임씨들

아빠 : 그 후 1923년 이러한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이곳에 임씨가묘 유지비를 건립하였고 1957년 서울에서 전국 임씨 총회를 거쳐서 이곳의 낡은 사당을 다시 중수하고 숭모각을 추진하였어. 당시 임지수, 임교승, 임헌빈, 임봉수등이 주관이 되어 1958년 삼문이 건립되고 5년 후인 1964년 3월에 본전이 복원되었지.

처음 의도는 당나라 8학자의 위패를 모시려고 했는데 사정이 생겨 충절공 임팔급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만 모시게 되었지.

(배향인물 - 충절공 임팔급,충선공 임몽주, 금성군 임자미,충숙공 임희,평택공 임견미,희성군 임기미,문헌공 임계미,회진공 임비,서하공 임춘,문화공 전서 임난수,부사공 임목,사직공 임서,위의공 임흥,익산백 임환,판서공 임윤덕)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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