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루고..."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루고..."
  • 이정우
  • 승인 2015.01.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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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칼럼]충락(忠樂)의 충신 임난수<2>, 독락정을 노래한 옛 글

   홀로 즐긴다는 '독락정' 전경
겨울바람 부는 독락정에서 임난수의 충정정신과 함께,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은 이후 많은 시인묵객이 기리며,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으리라 확신이 들었다. 그런 중 독락정에 걸린 기문을 읽어보다가 이곳 독락정과 관련된 선인의 글을 찾아 소개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조선초기의 것을 소개하고 다음에 이후의 것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임난수의 독락정과 관련한 조선초기의 것으로 확인되는 것에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이 제일 먼저 확인된다. 남수문은 문재가 뛰어났었던 모양이다. 비롯 그가 장수하지는 못했어도 서거정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빼어난 글 중에 뽑아서 모아 만든 『동문선』에 「독락정기문(獨樂亭記文)」이 수록되어있다. 이글의 내용을 해설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 양양도호(襄陽都護) 임후(林侯: 1371년(공민왕 20)∼1448년(세종 30). 임난수의 둘째 아들인 임목(林穆))는 일찍부터 정치를 잘하여 이름을 나라 안팎에 드날렸다. 옛날 내 선친(남금(南琴))이 함주(咸州:함경남도 동해안 접한 지역) 목사(牧使)로 계실 적에 임후가 통판(通判:군정을 감독하던 벼슬아치)으로 있어서 좋은 뜻으로 매우 긴밀하였다. 나는 그 연고로 임후를 아비처럼 섬긴 적이 여러 해였다.

하루는 임후께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공주 금강 상류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경상ㆍ전라ㆍ충청도의 요충이요, 강이 이곳에 와서 합류하기 때문에 지명을 삼기리라 한다. 사는 데서 남으로 5리쯤 나가면 끊어진 산맥이 있는데, 북으로부터 남으로 2리쯤 가다가 우뚝 솟아서 작은 봉우리가 된다. 쭉쭉 뻗은 대나무와 무성한 소나무가 새파랗게 늘어서서 퍽이나 아름답다. 세 개의 강이 꼬불꼬불 동쪽으로부터 그 아래를 둘러 흐르니 나(임목)는 일찍이 그 곳을 지나다가 신기하게 여기고 시험 삼아 한 번 올라보았다. 북쪽으로 원수산(元帥山)이 성곽(城廓)처럼 둘러싸 있고, 남쪽으로 계룡산(鷄龍山)이 반쯤 허공에 솟아있다. 그 동쪽과 서쪽에 여러 개의 산이 서로 마주보는 듯하기도 하고, 공경하게 허리를 굽히어 공손히 인사하는 듯하기도 하다. 기괴함을 팔고 특이함을 안은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촌락과 밭두렁은 먼데나 가까운 데나 바둑돌처럼 점점이 펼쳐져 있다. 나는 그 기이한 경치를 즐기고자, 이전에 이곳을 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하고 드디어 봉우리의 왼편에다 별장을 만들고 그 위에다 정자를 만들었다.

평평한 백사장과 가득 찬 강물은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루고, 바람이 불면 푸른 비늘이 일어난다. 달이 뜨면 물결이 은처럼 희며, 작은 배와 큰 배, 물고기와 새들이 오고 가는데, 떴다가 잠겼다 하는 것까지도 다 발 밑에 나타난다. 산의 층층진 봉우리와 첩첩한 고개, 큰 능선과 긴 숲이 가까이는 푸른 벌에 닿아 있고 멀리는 새파란 하늘과 어우러진다. 구름 연기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까지도 다 베게머리하고 누워서 볼 수 있다. 밭가는 사람(경부(耕夫))과 소치는 사람(목수(牧豎)), 물고기 잡는 사람(어부(漁父))과 땔감을 베는 아이들(초동(樵童))이 노래로 서로 화답한다. 쉬며 노는 사람, 길가는 나그네가 온 들판에 끊이지 않고 오가는 것도 역시 앉아서 구경할 수 있다.

   부안 임씨 가묘
나(임목)는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편안하게 머리에 간편한 두건 만을 쓰고 작은 지팡이로 날마다 이 정자에 오르면, 마음과 회포가 모두 한가하여 몸뚱이나 세상을 둘 다 잊어버린다. 혼자 강에서 고기 낚고, 혼자 산에서 나무하고, 봄철의 꽃과 달이 뜬 가을밤에 혼자 시 읊으며 낙을 삼고, 기이한 산 구름과 해맑은 소나무와 눈꽃을 혼자 보면서 낙을 삼고, 무릇 물상의 변화(物化)의 즐길 만한 것은 모두 나 혼자서 차지한다. 자유로운 심정은 마치 매미가 더럽고 흐린 속을 벗어나 만물(物)의 밖에서 노니는 것과 같다. 사철의 경치가 동일하지 않으나 나의 즐김은 홀로 변함이 없으며, 거문고나 대금과 함께 노는 때도 있지만 나의 즐김은 홀로 다함이 없다. 그래서 감히 속수(涑水)에서 태어난 사마광의 정원 이름인 독락(獨樂) 두 글자를 절취하여 내 정자에 편액(扁額)을 하였으니, 분수에 어긋난 짓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분(사마광)이 즐기는 것은 이치요, 내가 즐기는 것은 사물이니, 같은 이름이라도 서로 그 뜻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것은 없다. 청컨대, 그대(남수문)는 내 정자의 기문을 지어 달라” 하였다.

나(남수문)는 임후(임목)에게 나의 글 실력이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옛날 공자님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물만 마시고 팔을 베개 하여도 즐거움(樂)은 그 가운데 있다.” 고 하였다. 안자(顔子: 공자의 수제자(首弟子)인 안회(顔回, 513~482 B.C.))가 궁벽한 골짜기에서 가난한 생활을 해도 그 즐거움(樂)을 고치지 않는 것을 칭찬하면서도 그 즐기는 것에 있어서는 일찍이 말한 적이 없었다. 또 북송 때 학자인 정호와 (程顥, 1032 ~ 1085)와 정이(程頤, 1033 ~ 1107))는 학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자와 맹자가 즐기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역시 끌어주기만 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는 않았다.

지금 임후(임목)가 그 정자에서 홀로 즐기며 내게 글을 요청하였는데 이미 정자의 이름을 독락(獨樂)이라 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알 지 못한다. 하물며, 나도 비록 성현의 글을 읽었지만, 이른바 홀로(독(獨))라는 것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감히 임후(임목)의 정자에 기문를 할 수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그의 말에, “그(사마광)가 즐기는 것은 이치요, 내(임목)가 즐기는 것을 사물이라.” 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이치 밖에는 사물이 없고 사물 밖에는 이치가 없다. 이 때문에 천지의 높고 깊은 것이나, 산천의 흐르고 멈춘 것, 그리고 솔개의 나는 것과 물고기의 뛰는 것이나, 초목의 번영하고 시드는 것이나 간에 귀와 눈에 비치는 물상 치고 어느 것이고 지극한 이치가 각각에 부여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임후(임목)는 자신의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성현의 도를 즐기는 것을 찾을 수 있었으니, 어찌 한갓 그 경계만을 구경할 뿐이겠는가.

또 나(남수문)는 지금 세상의 사대부를 보면 자신의 전토와 농원(田園)이 있어 족히 자유롭게 지낼 만한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대부들이 영리의 굴레에 얽매어 동쪽으로 서쪽으로 치달리며 쉴 틈이 없다. 죽을 때까지 자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까지 있으며, 간혹 전원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어도 주판을 들고 돈이나 곡식의 이익을 계산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도 그 생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임후는 벼슬이 그의 덕에 차지 않았으며, 나이도 너무 늙지 않았는데도, 능히 벼슬을 사양하고 세속의 더럽힘을 벗어나서 산수 사이에 소요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독락이라는 편액이 역시 마땅하지 않을까.

   독락정 현판

이 정자는 곧장 사마광의 독락원(獨樂園)과 더불어 영원히 세상에 아름다움을 짝할 것이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사마온(司馬溫 : 필자주 ; 사마온은 사마광의 아버지다. 독락원을 건립한 사람은 사마광이다. 사마온과 사마광의 혼용으로 생각된다.)공은 천하의 명망을 짊어졌기 때문에 마침내 낙양(洛陽)에서 한가로이 노닐지 못하였는데, 지금 임후(임목)도 역시 명망을 짊어졌으니 과연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남수문) 같은 자는 조정에서 벼슬만을 훔치는 정도이고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고, 밤낮으로 분주해도 오히려 그칠 줄을 모르니 능히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언제나 벼슬을 버리고 임후와 이 정자에서 만나 사마광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외우고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으며 그들이 즐거워 했던 높은 취미를 한 번 엿볼 수 있으랴.

남수문(1408(태종 8)∼1442(세종 24)은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자는 경질(景質)·경소(景素)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기(奇)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금(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남수문은 1426년(세종 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33년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6년 중시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고 1442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 한양 도성 안에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몇 편의 전(箋)·기·묘지 등이 『동문선』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남수문은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한편 남수문이 쓴 「독락정기문」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 전체를 남수문이 쓴 것이 아니라, 기문을 의뢰한 임목의 글이 전반부분에 나오고 있어서 임목이 초야에 묻혀 호젓하게 살다간 임하지사(林下之士)로서의 활동과 삶을 엿 볼 수 있다. 임목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임목이 자신의 장원에 별도의 정자를 건립하고 이름을 독락정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곧 독락정의 실제 건립자는 임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락정은 임난수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간략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명실상부한 정자로서의 위상은 임목이 갖추었지만, 이미 임난수가 이곳에 정착하여 망국의 한을 달래고, 고려왕에 대한 충정을 곱씹으며 이곳에 작은 초막이라도 짓고, 허술하나마 정자로서의 기능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독락정의 건립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독락의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독락정에서 바라다 본 금남교
독락정과 관련된 기문이외에 조선초기의 시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서거정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1478년(성종 9) 『동문선』을 지어 남수문의 기문을 수록한 서거정도 독락정에 관한 시를 지었다. 서거정이 지은 독락정 관련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공주독락정(公州獨樂亭)」시로 전하고 있다. 서거정이 지은 시를 필자가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소년 시절의 명성과 값어치가 누가 감히 그대만 하겠는가 ( 少年聲價孰如君 )
만리 길 청운의 높은 벼슬길을 발밑보다 낮고도 평범한 것으로 여겼네 ( 脚底平看萬里雲 )
잠시 조정대신의 반열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은거하였으나 ( 暫屈朝班還舊隱 )
다시 영광된 벼슬이 따르고 높은 공훈에 책록되었구나 ( 更從榮宦策高勳 )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것이란 조물주의 진짜 희롱거리와도 같은 것 ( 功名造物眞如戲 )
사내대장부가 나간 곳은 쉽게 논할 수 없는 것 일 뿐 ( 出處男兒未易論 )
다만 두려운 건 조서를 받든 사자가 길 오르길 재촉하는 것 ( 却恐鳴騶催上道 )
북산의 원숭이와 학이 다시 옮겨가는 명분의 글을 새김일세 ( 北山猿鶴更移文 )
독락정이라고 이름 한 동산은 금강을 누르듯이 나직하게 자리했는데 ( 名園並壓錦江低 )
내가 옛날 찾아 가던 길에 길을 잃고 헤메였었지 ( 我昔相尋路自迷 )
어떤 성씨 보다도 임씨의 정자가 가장 멋진 곳이라네 ( 何氏林亭知最勝 )
두보가 오동잎에 시를 쓴 것과 같은 시를 쓰지는 못하고 ( 杜陵桐葉不曾題 )
수레 기름 쳐서 은자로서 살 수 있는 반곡에 가지 살지 못함은 한스럽지만 ( 膏車恨未從盤谷 )
어느 눈 온 밤 나룻배를 타고 친구를 찾아 가듯, 은자가 사는 독락정을 찾아갈 터이니 ( 雪艇終須訪剡溪 )
부디 여울물에 흔적을 감추고 안개 속에 거두지 마시지요 ( 莫遣藏湍仍斂霧 )
들으니 독락정은 세상에 이미 복숭아나무나 자두나무의 밑에 길이 난 것과 같이 유명하다고 하더라 ( 似聞桃李已成蹊 )

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면 독락정은 서거정이 이 작품을 작성하는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은 그런 현상을 마치 복숭아나무나 자두나무 밑에, 그 열매를 따기 위해 사람들이 드나들어 길이 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고 하였다. 곧 임목이 본격적으로 건립한 독락정은 건립된 지 수 십년의 시간이 흐르지 않은 15세기 후반부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명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은 본관이 대구(大丘)이다.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김종서를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학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계유정란의 공신인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서거정은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 (赤壁賦)’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사람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아주 뛰어난 재주(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1485년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서 벼슬하였고,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였으며,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난수 장군의 시기별 초상화
독락정과 관련한 조선초기의 글로 이행(1478(성종 9)∼1534(중종 29))의 독락정 관련 글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7권 충청도 공주목(公州牧)조에 글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남수문의 독락정 기문을 모두 인용하였고, 서거정의 시 일부를 인용하여 작성된 글이다.

이행은 본관이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지돈녕부사 명신(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추(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의무(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희(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 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1531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 (容齋集)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조선 초기에 독락정과 관련된 글은 남수문의 기문과 서거정의 시가 중심을 이룬다. 이들 기문과 시는 독락정의 아름다운 경관과 이곳에 은거하여 살았던 임목의 홀로 누리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겨울 바람 부는 독락정에 올라 금강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 그 옛날 임목도 이곳에서 겨울바람을 맞아보았을까? 임난수도 눈꽃을 보았을까? 그분들은 독락의 즐거움을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고 충국(忠國: 나라에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충성함)하고 임하지사(林下之士: 초야에 묻어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하고 여민(與民; 백성들과 더불음)하는 것으로 승화하였다. 그분들이 그럴 수 있었던 힘과 열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분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었지만 공간은 동일하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진정 나는 충국할 자질은 있는가? 임하지사 할 그릇은 되는가? 여민할 마음은 있는가?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열정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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