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만들었다고...참모는 참모일 뿐"
"왕을 만들었다고...참모는 참모일 뿐"
  • 임영호
  • 승인 2014.12.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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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이덕일의 '왕과 나',참모의 철학 설파한 책

   저자 이덕일
한국사와 중국사의 크게 다른 점 하나가 있다. 중국사는 참모사(參謀 史)인데, 한국사는 군주사(君主史)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참모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서술하는 것은 꽤 의미가 있다. 특별한 관점과 흡인력 있는 문체로 국사의 대중화에 기여한 역사학자 이덕일이 《왕과 나》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이 책《왕과 나》는 왕 곁에서 참모로써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김유신부터 홍국영까지 11명을 나름의 시각으로 한 사람씩 서술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침을 준다.

이덕일은 서문에서 항우(項羽)와 범증(范增), 유방(劉邦)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항우는 개인적인 역량과 집안배경, 군사적인 능력 그 모든 면에서 유방보다 앞섰다. 오로지 유방이 항우보다 앞선 것은 참모영입과 그 활용능력 하나이다. 그 하나의 차이가 천하의 패자를 뒤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참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고 강조한다.

김유신(金庾信)의 헌신과 희생이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가 비주류다. 그런데 비주류라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주류가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야출신인 김유신은 같은 처지인 김춘추를 만나 비주류인 자신을 주류로 바꾸고 세상도 바꾼 인물이다. 둘은 헌신과 희생으로 신라를 강한 국가로 변화시켰고 사실상 불가능한 삼국통일이란 위업을 달성하였다.

후삼국의 주인공은 궁예와 견훤이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장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승자가 된 것은 부하 장수들의 목숨을 건 헌신덕분이다. 그 주인공은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네 사람이다. 그들은 귀족출신도 아니고 직급이 높은 장수도 아니었다. 그들은 군웅할거시대를 끝내고 왕건으로 통일되자 다시 음지로 되돌아가 이름조차 희미하게 처신했다.

고대 국가시절 소서노(召西奴) 이야기이다. 조선중기까지는 여성들의 지위는 평등했다. 여성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대사회에서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하였고,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내부 투쟁 대신에 남하하여 백제건국을 택했다. 한국사의 원형은 사실 그녀가 한 것이다. 기득권에 안주에 눈앞의 현실만 보지 않고 밖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가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군주와 참모가 동등한 지위에서 건국을 도모한 경우는 드물다. 예외적인 인물이 정도전(鄭道傳)이다. 한 지식인의 가슴속 분노가 낳은 사상이 체제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배원(背元)이란 소신으로 유배 길을 택하였다. 거기서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는 혁명사상으로 무장한다. 그리고 이성계라는 혁명무력과 결합하여 목적을 이룬다. 다만 그의 과감한 토지개혁과 요동정벌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 사회가 내부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체제 자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평생 할 말 다하고 하늘이 준 천명을 다 살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혼자의 힘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군주를 만나는 시운이 있어야 한다. 그 행운의 주인공은 황희(黃喜)이다. 젊은 시절 바른 말 때문에 거듭 파직 당했으나 태종은 황희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고 중용한다. 세종도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반대했지만 내치지 않았다. 세종이 얼마나 신뢰했는지 육조판서가 실권을 갖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폐지하고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삼정승에게 권한을 주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할 정도다. 그의 인품이나 재능도 훌륭하지만 그를 알아주고 그가 보좌한 왕도 더없이 훌륭하다.

군주를 보좌하는 방식 중 드물게 정책으로 보좌한 사람이 있다. 김육(金堉)이다. 그는 변란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 고 믿었다. 당시에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방납의 폐해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방납업자들이 관료들과 짜고 착복하는 수수료가 원래 가격보다 수십 수백 배에 달했다. 대동법은 부과단위를 가가호호에서 전결 즉 농지 단위로 바꾸어 일괄적으로 쌀로 납부하는 것이다. 김육은 서인이지만 정작 김집,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기득권자들이 걸림돌이었다. 농지가 많은 부자양반이었던 그들이 대동법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의 의지는 확고하여 그의 뜻을 관철했다. 효종과 현종 때 백성들은 극심한 천재지변과 대기근에 시달렸다. 이 재앙을 극복하는 데에는 대동법이 크게 기여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정책소신이 그만큼 중요하다.

한국사는 유교적 관점에 숭중사대주의(崇中事大主義)의 관점이 더해져 서술된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여성의 경우 폄하가 가중된다. 그런 폄하를 거두어 내고 그 사람을 바라보아야 그 시대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천추태후가 천하의 악녀이다 는 설은 모함이다. 고려시대 천추태후(千秋太后)는 한 국가나 조직에서 노선을 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유교식 정치이념을 수용한 성종은 전통 풍습마저 바꾸는 사대주의 정책을 고수했다. 이에 반하여 천추태후는 서경을 중시하고 팔관회를 비롯한 불교중시의 고려건국이념과 전통사상을 지키려했다. 그러나 중국식 유교체제를 지향하는 유학자들의 반란에 의하여 아쉽게도 쫓겨난다. 냉철하게 말하면 정권 획득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권으로서 이룩하여야 할 노선이 있을 때 권력을 차지해야한다.

 

조직이나 나라, 시대에는 때로는 악역이 필요하다. 강홍립(姜弘立)이 그런 인물이다. 광해군은 임란 초기에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었고 혼신을 다하여 전쟁을 치른다. 임란이 끝나자 만주족 누루하치는 명나라 정벌에 나서고 명은 우리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중원의 세력판도를 냉철하게 읽고 군대파견을 꺼렸으나, 서인, 남인, 북인들 4색 당파 모두가 군대파견에 의견일치를 이루었다. 광해군은 신하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문관인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파병을 했다. 그러나 보급품 하나도 제대로 못 받던 조선군들은 후금의 복병을 만나서 전멸한다.

그런 사이 광해군의 중립적인 외교정책이 명나라 은덕을 저버렸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쫓겨난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항복하고 조선의 전후 사정을 말하고 화의를 도모하여 후금의 남하를 저지한다. 강홍립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자기운명을 받아드렸다. 그가 죽은 후에는 또다시 사대주의 명분론이 횡행하여 결국 치욕스런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시련을 당한다. 도대체 조선은 누구의 나라인가?

왕을 보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역사에서 실무형 참모는 양반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 평민인데도 전문지식만으로 판서에 까지 오른 사람이 있다. 토목 건축기술로 활략한 박자청(朴子靑)이다. 그는 우직한 충심과 성실한 태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아 경회루를 비롯한 궁궐, 성균관, 종로의 긴 행랑, 동대문 밖의 마장, 살 곶이 다리 등 조선 개국 초 서울의 건축물과 도성 대부분을 설계 감독했다. 박자청에 대한 실록의 평은 박했다. 아마 한미한 출신 배경이 그이유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도 그런 신분에서 1품까지 오를 수 있었던 사회가 존재했다니 조선 초기는 대단히 역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권력을 최고 가치로 삼는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평생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했다. 그의 아버지 한확은 명나라에 누이를 팔아 명예를 샀다. 그리고 세조의 찬탈에 협조하고 정략 결혼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인수대비는 세조의 장남과 혼인했으나 일찍 죽었다. 그러나 한명회와 짜고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한명회의 딸이 죽자 성종의 비로 세력가가 출신이 아닌 왕비 윤 씨를 택하였으나 폐출하였으며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되자 인수대비는 치욕을 당한다. 권력에 대한 맹신이 부른 화(禍)다.

참모는 참모일 뿐이다. 아무리 왕을 만들었어도 신하는 신하이다. 어떤 참모는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여 군신관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권력을 향한 끝없는 상승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홍국영(洪國榮)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세손시절 수많은 위기에서 구해준다.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신임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그는 노론의 영수가 되겠다는 야심 이외에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책을 가졌다. 그 후궁이 죽자 이제는 자기가 의중에 두는 자를 정조의 양자로 들일 의도를 가진다. 정조는 나중에 홍국영이 정조의 왕조가 아니라 홍 씨 자신의 왕조를 꿈꾸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홍국영을 퇴출시킨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마음속의 불운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참모의 한계를 망각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 책 서두에서 역사의 의미와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장점은 일의 시작과 과정, 결말까지 모두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역사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그러나 앞선 수레가 잘못된 길을 가다가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그 길을 가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다. 아마도 욕심이나 오만이 눈을 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한다. 겸허하게 성찰하는 자에게만 미래의 문을 살짝 열어준다.”

이 책 《왕과 나》는 냉혹한 현실에서 역사 앞에서, 조직 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세상을 읽는 지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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