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있는 자의 땅에만 든 풍년
힘있는 자의 땅에만 든 풍년
  • 이정우
  • 승인 2014.11.04 09: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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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농정과 세금제도 개혁안을 제시한 한충

   한충과 부인 강씨의 묘
가을걷이가 한창인 행복한 만추이다. 가을이 물든 들녘을 바라보며, 옛 선인들도 추수의 기쁨은 오늘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의 지식인이자 위정자들은 어떠했을까?

이들에 있어서 추수는 단순히 수확의 기쁨만이 아니라 국가운영과 백성의 삶을 같이 고민해야 했던 숙제였으며, 국가의 세원확보와 백성의 행복 추구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수확에 뒤따르는 세금으로 인한 백성의 부담과 고통에 대한 문제는 위정자로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다.

이런 농정과 세금 부과에 따른 백성의 문제점에 대해 한충도 자신의 문제인식을 표출하였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한충이 인식하고 있던 이것은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기 위해 1516년(중종11) 초가을에 낙향하면서 생기게 되었다. 한양에서부터 고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을을 거치는 여정에서 농정의 폐해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17년(중종12) 수확 철이 되기 시작한, 8월21일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것에 맞추어서 당시 전개되던 농정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그것의 개선점을 상소하였다.

먼저 경작과 관련하여 경작하지 않은 휴경지와 곡식의 작황상태가 좋지 않은 땅에 대한 이유를 개진하였다.○ ‘전지(田地) 중에 풀만 나고 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농사지을 철에 가뭄이 들어 봄에 굶주렸으므로 백성들의 밑 거리가 떨어져서 심지 못한 것이다’. ○ ‘모만 심고 가꾸지 않는 것은 보리 흉년이 들었으므로 양식이 떨어져서 경작하지 못 한 것이다’. ○ ‘곡식의 알이 뱄으나 패지 않은 것은 ‘백성들이 굶주려, 몸이 지쳐 곡식을 늦게 갈고 가을에야 매었기 때문이다’. ○ ‘곡식이 패기는 하였으나 여물지 않은 것은 우박이 내리기도 하고 가뭄이 들기도 하여 곡식이 여물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농업 경작의 문제와 관련한 휴경지의 발생과 작황 불량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가뭄과 우박과 같은 자연재해가 그 원인임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백성들 곤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자연재해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4∼5월에는 눈과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생장하지 못하게 하고, 6월에는 우박이 내리고 7월에는 가물어서 농작물의 작황을 좋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날씨는 정말 좋지 않았고,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댔으며, 바람과 햇빛과 비의 혜택을 입지 못해서 곡식이 잘 맺지 못하였다. 혹 수확할 만한 밭이 있더라도 손실이 있어 그 손상을 보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농사가 시작되는 4월부터 자연재해가 있기 시작해서 한참 농사철인 6월과 7월까지 계속되어 농사가 제대로 되지 못함을 피력한 것이었다.

   한충 재실
그런 한편 한충은 이러한 자연재해 뿐 아니라 백성이 굶주리는 문제에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원인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지아비는 나라의 노역공사에 동원되어 나가고 아낙만 남았으므로 봄에 경작할 수 없어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어 굶주림이 발생 한 것이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굶주림의 양상은 ‘백성들은 저녁에도 밥을 짓지 못하고 아침에도 굶었으므로, 곡식이 익지도 않은 경작지에 들어가 이삭을 골라 뽑고 낟알을 주워 모아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하였다’라고 하여 국가의 과도한 인력 동원도 원인이 있음을 지적 했다.

따라서 한충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국가나 위정자들은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제방이나 저수지 등의 수리시설 등 자연재해 극복시설 갖추고, 국가적으로 인력 동원은 농업에 종사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여야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묵시적으로 주문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충은 경작지의 소유실태와 이와 관련한 ‘풍년 들었다’고 하는 소문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먼저 토지 소유 실태와 관련하여, ‘땅이 기름지고 연못이 깊어서 벼가 무성하고 잘 익은 것은 힘 있고 세력이 강한 집안의 전지’이며, ‘흙이 두텁고 기름진 땅은 모두 세력 있는 자가 모두 가졌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서 ‘땅이 메마르고 모가 자라지 않고 벼가 되지 않은 것과, 큰물이나 가뭄의 해를 당하는 것은 모두가 가난한 백성의 전지였다’고 지적하였다. 곧 물대기 좋고 흙이 풍부한 비옥한 땅은 힘 있고 세력 있는 자들의 것이고, 물대기도 힘들고 흙도 빈약하여 농사짓기에 척박한 땅은 가난한 백성의 것이었다고 하여 토지소유의 불균형을 지적하였다.

한충은 ‘풍년 들었다’고 하는 풍문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정에서만 있을 때에는, 남들이 ‘풍년 들었다’고 하면 자신도 그렇게 풍년이 들은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농촌현장에 와서 보니, 사실은 소문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양 조정에서의 풍문과 농촌 현장의 사실이 달랐던 이유에 대해서 한충은 ‘힘 있고 세력 있는 집안은 재력에 여유가 있고 전지에는 연못이 있으므로 농사에 힘쓰기만 하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때가 없다’고 인식하였다.

   한충 시비

곧 구조적으로 세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땅은 농사가 잘되고, 풍년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임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풍문으로 ‘풍년 들었다’고 하는 것은 힘 있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남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저자와 조정에 옮겨 전하여 ‘곡식이 여물었다’ 하거나 ‘풍년 들었다’고 한데서 기인하는 것인데, 이 풍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풍년 들었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곧 ‘풍년 들었다’고 하는 땅은, 힘 있고 세력 있는 사람들의 땅이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땅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충은 “힘 있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자랑삼아 자기네 땅이 ‘풍년 들었다’고 하면서 이것이 소문으로 불거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충은 또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땅은 풍년이 들지도 않았는데도 힘 있고 세력 있는 사람들의 땅이 풍년들었다고 하는 것에 싸잡아서 풍년들었다고 취급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질타였다. 그러면서 국가에서 “백성들의 고충은 살피지 않고 ‘풍년들었다’고 하는 ‘겉만 화려한 말’을 믿고서, 한해의 절기가 순하여 농사가 잘되었다고 생각하여 백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되 줄여 주지 않고, 백성을 부리되 부역을 쉬게 할 줄 모른다면, 백성이 남김없이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충은 수확물에 대한 세금과 공물 납부의 폐단에 대해서도 “백성의 근심은 재해를 살피는 것이 투명하지 않고 토지나 작황의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공평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세금 부과의 문제와 공물 받치는 방법과 절차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한충은 우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과 그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세금 제도와 관련하여 세수를 파악하기 위해서 파견하는 관리가 몇 단계로 이뤄져 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지방의 감사가 군현의 수령을 차출해 보내어 논밭에 가서 직접 작황을 조사하게 하면. 수령은 흉년들은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길만 따라 가면서 일을 위관에게 맡겨 버리며, 위관은 서리에게 맡겨 버린다’고 하였다. ‘서리도 산 넘고 물 건너는 험한 길을 꺼려서 평탄한 길만 선택하여 여러 고을을 다닌다’고 하여 세금 부과를 위한 실제 경작의 상황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곧 그 작황의 실제를 파악하는 단계가 너무 많으며 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정확히 파악 되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한충은 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파악하는 작황사실에 아주 심각한 왜곡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우선, 작황사실을 파악하러 나간 서리는 ‘뇌물을 받는데, 힘 있고 교활한 자에게는 혹 곡식이 여물었어도 재해를 입은 것으로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혹 재해를 입었어도 여문 것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제 수확내용이 파악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으며, 이러한 결과로 세금의 부담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에게 전가된다 인식하였던 것이다.

또 한충은 지방의 ‘수령은 많이 거두어들이는 데에 힘쓰므로, 흉년인데도 흉년이 아니라 하고 곡식이 조금만 잘되어도 크게 잘되었다 하여, 그 작황의 등급을 높여 처리하니, 그것이 투명하게 처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고을의 수령은 작황의 등급을 높여야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할 수 있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목민관으로서 지방통치를 잘했다고 하는 성적으로 인식하였으며, 더 나가 수령 자신의 영달과도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작황 사실을 왜곡하여 등급을 높이는 결과가 발생하였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왜곡 과장되어 부풀려진 작황 등급에 대한 세금은 고스란히 백성이 부담져야 할 몫이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충 묘역에서 바라다 본 원수산
이와 같이 작황의 왜곡 이외에 한충은 세금 부과에 갖가지 잡다한 명목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환상이라는 환곡은 금년뿐 아니라 이전 년도의 것도 누적이 되었고, 특산물을 받치는 공물은 대신 내어 주는 방납 뿐 아니라 직접 납부하기도 해야 하는 직납이 있으며, 토지세인 전세는 환곡과 방납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명목의 세목”이라고 하였다. 곧 세금을 부과하는 명목이 잡다하고 다양하니 그 세금의 부담을 백성이 당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과장 왜곡된 세금과 잡다한 갖가지 명목의 부가적인 세금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결국 백성들이 굶주리는 결과가 초래됨을 지적한 것이었다.

세금부과의 문제로 말미암아 파생된 문제를 한충은 또 지적하였다. ‘밭을 팔아 국가의 부담을 갚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익은 부자 집으로 돌아 간다’고 하였다. 곧 백성들이 땅을 팔아서 국가의 부담을 갚고자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세금을 납부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부담으로 집에 먹고 살만한 여유가 없게 된 사람들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떠돌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세금을 내지 못한 부분을 그 집안의 남은 일가친족에에 전가하여 그 일족을 구박하며, 그 일족도 없을 경우에는 동서남북의 이웃집에게 나누어서 배정하여 세금을 부담 지워 빼앗아 내고 만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금제도의 문제로 말미암아 가난한 백성들은 더욱 가난하게 되고, 일가친족이나 한동네 이웃집은 부담이 가중되니 이 때문에 ‘마을이 점점 비어가고 군대 갈 남정네의 병력자원이 날마다 줄어들며, 들과 밭은 더욱 황폐해 가는데도, 지방 수령은 자기네 고을에는 이와 관련한 아무런 잘못된 일도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총체적 문제점을 자연재해나 하늘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충은 이런 세금 부과의 문제와 함께 특히 경작지를 묵히는 이른바 ‘묵밭에 대한 세금 부과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묵밭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은 원래 ‘백성들의 게으름을 징계하고 황폐한 땅을 개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묵밭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밝히었다.

묵밭이 발생하게 된 것은 ‘밑 거리가 떨어져서 심지 못하거나, 양식이 떨어져서 경작하지 못하기도 하고, 도망했기 때문에 묵은 것도 있고, 죽었기 때문에 경작하지 못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묵밭을 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살피지도 않고, 국가에서는 오히려 ‘굶어 죽게 된 백성에게 게으름을 피워서 묵밭이 발생하였다고 백성들을 책망하고,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굳이 토지세를 요구하여 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그 이웃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그 일족에게 핍박을 주니, ‘묵밭의 폐해’가 그 본래 당초의 뜻에 매우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한충 묘역, 시비와 신도비, 묘비 등이 가지런하게 서 있다.
그러면서 한충은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우선 ‘묵밭의 세금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대간·시종 중에서 투명하고 총명한 자를 골라 어사의 직함을 겸하게 하여, 향촌의 마을로 드나들며 한해의 풍년들고 흉년드는 작황을 살피고 자연재해의 피해를 상세히 살피게 하자’고 하였다. 곧 전세를 부과하기 위한 작황을 파악하는 ‘전담어사’제도를 두자고 하였다. 지방의 관리들에 대해서는, ‘지방의 서리로 하여금 술책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수령으로서 공평하지 않고 근신하지 않는 자는 특별히 형량을 무겁게 하여 유배 보내거나 사형에 처하고, 그 자손도 아울러 관직에 등용하지 말도록 하자’고 하였다. 또 군현의 아전으로서 백성의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는 자에 대해서, ‘가장 심한 자는 목을 메어 죽이고, 그 주검을 만천하에 전시하자’고 하였다. 토지세금에 관한 혁신적이고 강경한 제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한충의 이와 같은 토지 세금부과와 관련한 제도 중 특히 '묵밭의 세금 폐지론'은 조정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켜 논의가 있게 되었다. 한충이 농정과 세금 부과제도의 폐정을 지적하고 그 혁신안을 제시한 이틀 뒤인, 8월 23일 영의정 정광필은 ‘가뭄이나 서리의 재해 때문에 경작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 중에서 더욱 심한 것을 가려서 면세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좌의정 김응기도 ‘도망하였거나 자손이 끊어져 상속자가 없는 가구는 가려내서 전세를 받지 않으며, 도망하여 떠도는 자도 다시 모여서 살게 하자’고 안을 내게 하기도 했다. 곧 한충이 제시한 토지 제도와 관련한 세금부과 및 토지제도의 운영 개혁안이 조정에서 논의 될 만큼 타당성이 있던 것이었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가을걷이가 한참 진행 중인 들녘에서 한충이 인식한 농정과 그 관련 세금제도 개혁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한충은 300여년 뒤인 조선후기의 토지제도나 세금제도의 문제를 이미 예견하고 미리 내놓은 것이었던가? 조선전기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과거 어느 시기나 있던 구조적인 문제란 말인가? 또 세금이나 농정의 문제는 비단 과거 전근대 역사시대만의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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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2014-11-09 23:07:28
항상 좋은글 감사함니다^^ 한충에 대해 잘 알게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