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편 작은 언덕에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윙윙윙’ 꿀벌들의 행진이 한창이다. 알록달록 온갖 꽃들까지 피어 난 뒷동산의 정경을 눈에 담아두자니 지난 가을 잘 여문 알밤이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놀라던 일이 떠올랐다.
운동장 한쪽에 지어진 정자에 잠깐 머무노라면 솔밭에서 들여오는 온갖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음원을 굳이 켜지 않아도 자연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누구라도 그 아름다운 소리를 감상하려고 눈을 감지 않을 수 없다. 주변 환경만으로도 수왕학교는 전원적인 특성이 으뜸이다.
이렇게 작은 소규모 전원 학교의 교감이라고 행정 업무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선생님들처럼 수업을 담당하기도 한다. 내가 맡은 과목은 전교생의 음악수업이다. 학생들의 맑고 맑은 동심과 함께하는 음악 시간이 무척 즐겁다.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노라면 나도 어느새 학생들과 하나가 된다.
이제 리코더를 배우기 시작한 3학년 예솔이는 음악책에 계이름을 적어가며 투~ 투 투르트 리코더 삼매경에 빠져있다. 복식수업으로 진행되는 5~6학년 학생들은 리코더로 대선율과 함께 2부 합창곡을 연주하고는 자신들이 내는 화음의 아름다움에 놀라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교감선생님! 너무 멋지세요. 이렇게 잘 가르쳐주시니 감사해요. 리코더 화음이 우리들처럼 아주 잘 어울려요.”
자주 삐지고, 울기를 잘하는 덩치 큰 형중이는 외모나 성격과는 의외의 행동을 하기도 한다. 쉬는 시간에 나에게 수시로 다가와 속삭인다. “저는 음악 시간이 좋아요. 매일 음악만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렇게 조잘대는 수왕의 아이들이 솔밭에 모여 사는 새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 짓는다.
점심시간이 다가와 교무실에 내려가 보니 아무도 없고 텅 비어있다. 또 텃밭에 나가 오이, 풋고추, 상추를 뜯어 풍덩풍덩 물에 담갔다 씻어 건져서 쌈장과 함께 점심 만찬을 준비하기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수돗가에는 하하 호호 웃음꽃과 함께 물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가득하다. 오이는 썰고 고추와 상추는 그대로 접시에 수북이 담아 놓으면 식탁은 그야말로 ‘푸른 들판’이 되어 버린다. 어쩌다 수육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상추쌈을 싸서 볼이 미어져라 먹으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래, 아무리 고기를 먹지만 푸른 들판을 향유했으니 섬유질이 많아서 배가 쏙 들어가겠지?’
수확의 계절 구월의 즐거운 점심시간은 그렇게 해맑게 지나간다.
학생들이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북적인다. 재잘재잘 소곤소곤 참새들과 어울려 형형색색의 아기 새들도 하늘 높이 오르내린다. 늘임봉에 빙글빙글 돌며 끝까지 올라가 맨 위의 볼을 탁 쳐서 가장 먼저 올라간 사람이 이기는 점핑 볼, 서커스 묘기 부리듯 두발을 힘껏 굴러 세상을 내려다보는 재미에 맛을 들인 트램플린, 모두가 제각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5학년 민재가 다리를 절뚝이고 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얼른 뛰어 가보니 정글짐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아래로 그대로 떨어진 것이다. 민재는 태권도 유단자에 운동 신경도 발달하고 움직임이 활발한 학생인데 믿을 수가 없다.근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나에게
“정글짐에서 떨어지면서 신발의 앞부분을 조여 주는 찍찍이 끈에 걸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죠.” 라고 말하며 민재는 밝게 웃음을 짓는다.
다른 친구들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지만 우리는 꽃동산 바위에 걸터앉아 민재를 데리러 올 어머니를 기다렸다. 민재를 데리고 가면서 민재어머니는 “우리 아이를 혼자 두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며 인사를 건넨다. 아까 웃던 민재와 민재 어머니의 함박웃음이 꼭 닮았다.
가까이 보이는 산언덕의 풍경이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답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행복한 수왕의 뜰 안에는 이제 조용한 저녁 어스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