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문지화 박팽년, 그의 후손은?
멸문지화 박팽년, 그의 후손은?
  • 이정우
  • 승인 2014.09.12 10:33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우의 Story in세종]박팽년 둘째 아들 부인 잉태로 직계 계승해

   세종 향토사 연구회원들이 박팽년 후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답사하고 있다.
우리네 최대 명절인 추석이 지났다. 추석은 한해의 수확을 있게 해 준 대자연에 대한 감사와 그 수확물을 조상님께 올리며 예를 갖추는 날인 것이다.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이는 분명히 어머니와 아버지고, 그 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곧 조상인 것이다. 그런 조상에게 사람으로서 예를 갖추며, 자손들 간의 화합과 우애를 나누는 것이 추석이다.

이렇게 현재를 살아가는 자손으로서, 나를 있게 해 준 조상에 대한 은혜와 감사는 끝이 없는 것인데, 특히 순천박씨 충정공파 사람들은 조상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의 사연이 있다.

순천박씨 충정공파는 박팽년의 직계후손들이다.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와 관련하여 박팽년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직계 존비속 남정네 혈육은 모두 죽고, 여인네는 종으로 전락하는 멸문지화(반역과 모반을 한 자에 대해 그의 집안사람이 다 죽임을 당하여 가문이 없어지게 하는 재앙)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팽년의 직계 자손은 계승이 된 것이다. 어떻게 박팽년은 후손을 계승할 수 있었을까?

박팽년의 가계를 보면, 박팽년과 그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이 직접 가담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팽년의 형제와 박팽년의 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본인, 그리고 형제로 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또 박팽년의 아들 박헌(朴憲)·박순(朴詢)도 죽임을 당하였고 박분(朴苯)은 유배되어 안치되었다. 그런데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은 그의 부인이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이분이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서 박팽년을 직계로 계승할 수가 있었다. 

   태고정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가운데, 박팽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또는 이철근)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둘째아들 박순의 부인은 성주이씨 이다. 친정아버지는 당시에 달성 현감으로 있었고, 자신의 친정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였다. 이런 사정으로 성주이씨는 자신의 친정동네와 인근에 있는 대구 관비로 자청해서 갔던 것이다. 성주이씨는 이 때 배속에 아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해 가을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당시 반역자의 자손 중에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세조의 명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도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바와 같이 여종이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았고 이에 그 종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바꾸어서 아들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박팽년 가문을 잇게 하였다. 그래서 아들은 이름을 여자 계집종이란 뜻으로 비(婢 여자노비)라고 지었다. 이렇게 신분을 숨기고 위장하여 박팽년의 피는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박팽년의 피가 계승된 것과 관련해서 1603년(선조36) 4월 21일자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박일산과 고령 김씨 묘
‘사헌부가 아뢰기를, ···중략··· 태안 군수(泰安郡守) 박충후(朴忠後)는 ···중략··· ‘문종조(文宗朝)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誅殺)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는 유복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들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선조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유복자’라고 하였으니, 유복자 였던 점은 분명했고,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 문채날 비)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였다’고 하였으니, <<연려실기술>>에서 전하는 것과 같이 여종의 딸과 바꿔치기 했던 것과는 비교가 된다. 또 아들의 이름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비(斐)라 했고, <<연려실기술>>에서는 비(婢)라고 하였으니 대조를 이룬다.

박팽년의 손자 박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연려실기술>>은 자세히 기록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 가운데, 박팽년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박비는) 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472년(성종3)은 박비가 17살이 되던 해 였다. 당시 경상도에 부임해 있던 이극균(1437년(세종 19)~1504년(연산군 10) / 본관 :광주(廣州) / 1469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부임)은 박비의 아버지 박순과 동서사이였다. 이극균이 처가인 하빈면 묘골 성주이씨 집안에 왔다가 박비가 생존해 있으며, 그 사연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연을 들은 이극균은 박비에게 세조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자수하라고 권하였고, 이에 박비는 자수를 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이름을 ‘오직 하나뿐인 산호보석 같은 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일산(壹珊)이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래서 이후 박비(朴婢 혹은 朴斐)는 이름이 박일산(朴壹珊)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열려실기술>>은 박팽년의 며느리 성주이씨 부인에 대해서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라고 특별히 기록하였다. 당시에 역모에 가담하여 관비가 된 여인들 중에는 권력자의 첩(妾)이 되거나 개가(改嫁)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성주이씨 부인은 아들 박일산을 키우며 절개와 의리를 지키며 살았음을 특별히 칭송하여 기록하였던 것이다. 충신의 며느리로서의 절개를 지키다 간 삶의 표본이었다.

박팽년의 후손이 있는 곳이거나 박팽년의 유적이 있는 대표적인 곳은 전국에 몇 곳이 있다. 우선 세종시 전의면·전동면과, 대전시 동구 가양동·이사동,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충북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및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묘가 그것이다. 이중에 직계후손이 살고 있으며, 박팽년 유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은 대구시 하빈면 묘리이다.

   삼가헌을 둘러보고 있는 회원들
특히 묘리는 ‘묘골’이라고 하는데 묘골은 사육신의 인물 박팽년의 후손이 550년을 넘게 살고 있는 마을이다. 묘골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묘리에 살고 있는 후손의 말에 의하면, “묘골은 사람이 돌아가시면 쓰는 유택(幽宅)인 묘(墓)가 많아서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곳의 “지역이 오묘(奧妙)해서 그렇다”고 한다.

“원래 묘란 글자는 계집녀(女 )변의 묘(妙) 글자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후손들은 글자에 여자가 들어간다고 하여 설립(立) 글자 부수로 변경하여 묘(竗)자로 사용했다”고 한다. 필자가 묘골의 형상을 보니 이곳은 영락없는 여인네 그곳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풍수지리로 승화시키면,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 또는 파자형(巴字形) 지세의 명당이 되는 것이다. 즉 휘돌아 가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는 형국의 땅이다. 돌고 있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다시 도니 기운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며, 외부에서의 기운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곧 내부에 에너지가 강하게 모인 땅이다. 곧 회룡미고형은 강한 에너지의 지속창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태어나는 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수사상은 현대시대에 들어와 딱 맞아 떨어졌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1907년 11월 8일~2000년 1월 3일)여사가 이곳 묘리 64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9선 국회의원에, 13대, 14대, 15대 3선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1925년 9월 12일 ~ 2014년 5월 3일)선생이 이곳 묘리 641번지 일대에서 태어났다. 묘골은 우리나라 제1의 재계를 있게 한 어머니를, 제1의 정계 국회의장을 낳은 마을이다. 이것이 비단 회룡고미형의 풍수지리 때문 만 일까? 아니면 박팽년의 올곧은 충정을 본받은 정신 때문이었을까?

이제 558년이 지난 지금 박팽년과 사육신을 위한 뜻있는 행사가 세종시에서 개최된다. 충신 박팽년을 기리는 뜻있는 역사학술세미나가 세종시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2014년 9월 20일 열린다. 박팽년의 세거지가 있는 전의면 관정리를 어떤 역사적 위치로 위상을 정할 것인가? 또 관정리의 어디에 어떤 역사적 시설물을 놓을 것인가? 전동면 송정리에 있는 박팽년의 할아버지 박안생의 묘역은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가? 등이 주요한 내용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세종시는 충청남도에 속했던 연기군이 아니다. 우리나라 행정중심복합도시이자 특별자치시이다. 세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종시는 발전이 무궁한 고장이다. 새로운 소재가 생기고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는 땅이다. 추석을 맞이하고 박팽년 관련 역사학술세미나를 즈음하여 생각해 본다. 나에 있어 조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나는 조상에 있어서 무엇인가? 조상이 뜻하시는 바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조상과 관련하여 세월이 변하고 인심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유복자로 태어난 박일산, 또 그 유복자를 키운 어머니 성주이씨, 그분들의 마음을 나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임재한세종시문화해설사 2014-09-15 23:39:02
교수님 안녕하시죠?
세미나 하는날 뵐께요
존글 감사합니다
세종향토사간사 임재한

팽년 2014-09-14 21:14:14
이정우 선생. 글 잘 보고 있슴다.
항상 감사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