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 선생 숨결이 여전한 '밀마루'
초려 선생 숨결이 여전한 '밀마루'
  • 임영수
  • 승인 2012.06.22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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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장대, 도리미, 밀마루라 불리는 종촌

여섯째 날 - 종촌리(宗村里)

   종촌리 시가 모습
종촌리는 백제 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일찍이 장터가 발달한 마을이다.
조선 태종 때에는 공주(公州) 지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조선 말엽에는 공주군 삼기면의 지역이었다. 낮은 산등성이에 있다하여 밀마루. 즉 종촌(宗村)이라 부르며 장터로도 불린다. 종(宗)은 ‘밀종’자이고 촌(村)은 ‘마루촌’이라 불리운 이름이다. ‘장대(場垈)’라고도 부르고 ‘도리미’라고도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촌리(宗村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재영 : 종촌리는 연기군 남면의 중심지이지요?

아빠 : 그래. 남면 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지구대, 장터 등 주요시설이 있으니 중심지라 하지.
종촌리는 1구, 2구, 3구로 나누는데 1구는 도리미, 2구는 문마루, 3구는 샛골이 중심 마을이지.

재영 : 1구가 ‘도리미’라 부르는 이유가 있나요?

아빠 ; 이곳을 ‘도산’ 혹은 ‘도리미’라 부르는데, 도산이라 부르는 것은 이곳에 도학군자(道學君子)의 묘(墓)가 있고 선비가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도산(道山)’ 또는 ‘도림(道林)’이라 불렀으며 도리미라는 유래는 편안한 마을의 속칭인데 ‘방우간도림(放牛干桃林)’의 평화촌(平和村)이란 뜻도 된단다.
또 재미있는 유래는 ‘도리미’가 임씨가 돌림병이 돌아 도망갔다는 설과 원래 황씨들이 오래도록 살고 있는 마을이므로 타성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 못 살다 도로 나간다하여 붙여졌다고 하지. 실제로 이곳에는 황씨들이 420여 년 동안 살아오고 있어.

   성남 중.고등학교
재영 : 도리미라는 유래가 여럿인데 그 이유는 무엇이지요?

아빠 : 지명유래가 여럿인 것은 그 지명이 오래도록 쓰이면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새로이 붙여질 수 있지. 도리미가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만들어 졌다가 이곳에 황씨들이 많이 살면서 황씨들이 유리한 내용으로 바뀐 것처럼.

자 상지말로 가볼까. 이곳에는 조선중기 학자 초려 이유태선생의 묘소가 있어. 예전에는 도산제실이라 하는 경주이씨 제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제실은 없고 산 아래 자손들이 살고 있지.

재영 : 초려 이유태선생님에 대해서 들려주세요.

아빠 :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선생은 금산군 노동리에서 태어나셨어.
열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형인 이유택의 보호와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면서 학문에 전념하였지.
15살 때는 진잠의 가둔촌에 은거하고 있던 민재문(閔在汶)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8세부터는 연산에 거주하는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특히 1년 연상인 동춘 송준길과 같은 나이인 우암 송시열과는 우애가 남달랐어.

1630년(인조8년)에 별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전시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후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어.

초려선생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응한 것은 1634년에 김집의 천거로 희릉참봉에 임명되면서부터인데, 당시 그는 부임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큰형의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벼슬길에 나가라는 권고로 나가게 되었지. 그 후 1636년에 어머니와 큰형의 권고로 건원릉참봉으로 5개월간 재직하였어. 그러나 그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자 그는 “선비가 가히 출사한 의(義)가 없어졌다.”고 탄식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무주의 덕유산 아래 산미촌에 은거하였어. 이후에 대군사부, 내시교관, 세자시강원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지.

   종촌교회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김자점 일파를 견제하고 북벌을 도모하기 위하여 김상현, 김집 등 척사파와 산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는데, 이때 이유태도 공조좌랑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어. 친 청나라파들이 이들의 죄를 열거하였는데, 이때 조정이 시끄러워지는 단초가 되었어. 1650년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산림들은 결국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어.

이 같은 사건의 발단이 된 이유태의 상소는 후에 효종으로부터 광소(狂疏-미친사람)라고 낙인찍히어 한때 정거(停擧-유생에게 얼마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형벌)에 처하였지. 1651년 친 청나라세력이 중앙정계에서 축출되자 이듬해부터 다시 이유태의 재등용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어 1656년(효종7년)에 공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어 지평시강원진선, 장령, 집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한번도 부임하지 않았어.

1659년에는 다시 송시열, 송준길, 유계, 허적 등과 함께 밀지를 받고 조정에 나왔으나 당시 어지러운 조정과 사회를 개혁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는 곧 낙향하여 기해봉사(己亥封事)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어. 그러나 불행하게도 초고를 끝내고 정서하는 과정에서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셨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더 이상의 정치활동은 하지않고 공주의 중동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내다가 1684년(숙종10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1881년(고종18년) 시호를 문헌(文憲)이라 받았고, 송담리에 있던 갈산서원과 금산의 반계서원이 세워져 그곳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예변(禮辨), 의례문목(疑禮問目), 의례문답(疑禮問答), 시의문답(時疑問答), 역설(易設), 경의문답(經義問答), 사례홀기(四禮笏記), 사서답문(四書答問), 문산문답(文山問答), 정훈(庭訓) 등 출판 간행된 초려전집 18책이 전해지고 있어.

   종촌리에 있던 옛 서당 모습

이유태는 예송논쟁 이후 전의 비암사(碑巖寺)에서 대좌하면서 예서(禮書)를 저술하기도 하였지.

재영 : 예절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네요?

아빠 : 그래. 자 이번에는 창원 황씨의 황용정 묘에 가볼까.

재영 :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나요?

아빠 : 황용정은 장기면 금암리 금벽정에 살았어. 그는 어질고 학식이 많았으나 가난하게 살았지.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권하자 화용정은 저녁 한 끼 해 먹을 쌀밖에 없지만 아무 말 없이 스님에게 대접을 하자 스님은 밥을 다 먹고 가난한 선비의 마음이 갸륵하여 그 보답으로 묘 자리를 잡아주려고 물었어. 묘 자리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당대 발복지이고 다른 하나는 만대 영화지라 하였지. 황용정은 가난하게 살았기에 당대 발복지를 선택하였고 스님이 잡아 준 묘 자리로 아버지 황림의 묘를 이장하자 당대 발복이 되어 수사공의 벼슬을 얻었어. 훗날인 1990년에 황용정의 묘를 종촌1리 원산에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자 이제 종촌2리로 가볼까.

재영 : 종촌2리가 문화현이라 부른다고 하셨지요?

   초려 후손 이종순

아빠 : 그래. 그렇게 부르는데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단다. 조선말엽에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문인(文人) 한 사람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말하기를 이 마을을 문화현(文化峴)이라 부르면 장차 큰 마을이 될 것이라 하여 그때부터 문화현이라 불렀는데, 선비의 말대로 차츰 번창하여 남면의 중심도시가 되었지. 현재에도 남면의 주요기관인 면사무소, 농협, 지구대, 우체국 등이 있으며 시장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전에 장이 섰었단다.

재영 : 이곳 시장에서 장이 섰었어요?

아빠 : 그래. 이곳 시장은 1946년에 개설되어 1970년도까지 약25년 정도 장이 섰었는데,1970년대 시장에 화재가 발생하고부터 장이 서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지.

자 이제는 종촌3리로 가볼까.
종촌3리를 무엇이라 부른다고 했지?

재영 : 셋골이라 부른다고 하셨지요.

아빠 : 그래. 이곳을 셋골이라 부르는 이유가 삼대군수가 나온 마을이라 붙여졌다는 말과 이곳 산에는 3기의 묘가 있는데 모두 벼슬을 하신 분으로 내용은 이러하지.

임기상(林崎相) : 조선 철종 임우년(壬牛年)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냈고,
임병호(林炳鎬) : 조선 선조 임진년(壬辰年)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지냈으며
임성철(林成喆) : 조선 공종 기미년(己未年) 기린도찰방을 지냈지.

또한 이곳을 화옥동(禾玉洞)이라 부르기도 하고, 뽕나무골이라 불리는 곳도 있는데 이는 이곳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뽕나무 이름과 관련해서 부르는 곳은 바깥 뽕나무골, 작은 뽕나무골, 큰 뽕나무 고개, 작은 뽕나무고개(상현고개)라 붙여진 이름이 있어.
이렇게 뽕나무에 관한 지명이 많은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농사가 바로 누에치기였단다. 누에를 많이 쳐서 옷감을 얻어 수입을 올렸기에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었었지.

   초려 이유태 신도비
   초려 선생 묘
   초려 선생 묘
   초려 후손 이종순옹, 강헌서당 훈장을 하였다.
   방앗간
   미용실
   연탄나르기
   시장 구경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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