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 하나 되면 절대 무공이룬다”
“겉과 속 하나 되면 절대 무공이룬다”
  • 김장수 유성태극권전수관장
  • 승인 2014.09.03 15:21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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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무인들, 중국무술 고향가다 <8> 중국불교 첫 전래지 백마사

 중국에 첫 불교가 전래된 사찰인 백마사에는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 되는 역사가 남아 있었다.  
백마사(白馬寺)는 낙양시내에서 동쪽으로 약12km 떨어진 외딴 곳에 있다. 백마사가 지어진 시기는 한나라 때였다. 또, 역사적으로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면, 진나라를 멸망케 한 인물은 항우와 유방이다. 하지만 한나라를 세운 인물은 함께 봉기를 한 유방이었다. 유방은 초대 황제인 한무제이다. 이후 한나라는 왕망(王莽)에 의해 무너진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B.C 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있다가 64세 때인 A.D 9년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서기 9~25년)를 세운인물이다. 시호는 가짜 황제라는 뜻인 가황제(假皇帝) 또는 황제를 섭정했다는 뜻인 섭황제(攝皇帝)라고도 하며, 중국의 역사기록에서는 '찬탈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왕망을 무너트리게 인물이 바로 광무제이다. 광무제 이후를 후한이라고 하는데 2번째 황제가 바로 한 효명제이다. 지금부터 약 1950년 전인 효명제때 서기 67년에 인도 승려인 섭마등과 축법란을 위해 세운 중국 최초의 사찰이 바로 백마사이다. 효명제의 명을 받은 인도 승려는 백마(흰말)에 불경을 싣고 왔다가 말이 죽자 그 뜻을 기르기 위해 백마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불교와 도교의 도력을 겨룬 분경대의 모습
중국의 최초 불교사원인 백마사 역시 다른 절과의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백마사를 기본 모델로 사원이 형성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내부는 소박하며 선종의 6조사와 18나한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또한 당나라초기 측천무후 때 명재상이었던 적인걸[狄仁傑]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백마사 외각에 분경대(焚經台)가 있는데 분경대는 한나라 효명제 때 불교경전과 도교경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영평(永平)4년 정월 초 하루날 저선신(褚善信)을 비롯한 오악팔산(五岳八山)의 도사(道士) 690명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불꽃으로 불교와 도교의 우열을 가려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이에 단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불 수 있게 하고 단위에다 불교경전(佛敎經典)과 도교경전(道敎經典)을 함께 태웠는데 불경은 타지 않고 도경만 모두 타고 말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백마사 역시 불교와 도교의 논쟁과 당나라 측전무후 때 역시 정치의 중심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분경대(焚經台)는 불교(佛敎)와 도교논쟁(道敎論爭)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열을 가리기 위해 서로를 비판했던 그 논쟁의 흔적이 남은 안타까운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당태종 때 지어진 시인데 무명의 시인이 지어 무명씨의 작품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분경대를 제목으로 무명 시인의 시가 새겨진 돌. 
《题焚经台》的作者是唐朝詩人 무명씨(無名氏),
门径萧萧长绿苔,一回登此一徘徊(문경소소장록태,일회등차일배회)。青牛谩说函关去,白马亲从印土来(청우만설함관거,백마친종인토래)。确实是非凭烈焰,要分真伪筑高台(학실시비빙렬염,요분진위축고태)。春风也解嫌狼藉,吹尽当年道教灰(춘풍야해혐랑자,취진당년도교회)。저 푸른 이끼 쓸쓸한 낙엽소리에, 분경대에 올라 서성거리네/노자는 말없이 함곡관을 떠났고, 불경은 백마에 실려 인도에서 왔는데./
불에 태워 시비를 분명하게 하자하니, 진짜와 가짜를 가리려고 대(장작)를 높게 쌓았네./봄바람도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도교의 경전만 바람에 남김없이 태워져 버렸네. (참고로 해석이 무척 난해해 표현 전달이 어려움을 이해 바란다.))

        중국과 중국어에 심취한 오원근 박사의 부인

여행이란 그 뜻을 진정으로 알면 감동이 있고, 모르면 겉모습만을 보게 되며 웅장하고 화려함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약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가을에 수련생 분들이 나름에 중국무술에 심취해 중국의 명사들을 찾아 떠나자 제안한 분이 오 박사였다. 오 박사는 대덕연구단지내에 있는 정부출연연구소에 근무 중 여름휴가를 중국여행으로 향하면서 그의 부인과 함께 중국여행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여행은 서안과 무당산이었고, 두 번째 여행은 백두산과 집안이었는데 계획 역시 오 박사가 하였다. 함께 여행을 한 오 박사 부인은 두 번째 이후 중국어를 배워 이번 여행에 가이드가 되어서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현재의 그는 다문화 가족사랑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다양한 언어 구사와 깊은 신앙심으로 다문화가족 등 특히 이방인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하다.

특히 또 다른 한 분은 이번여행에 전문가  이드는 아니지만 전문가이드 이상의 중국어 실력을 갖추었으며, 내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우경명 선생의 부인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 참여하신 모든 유성도장 수련생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유성도장의 수련생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철학관을 갖고 심신단련으로 무덕(武德)을 쌓은 분들로 각자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골짜기가 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는 운동이나 여행에서서 하나가 되어 무사히 재미있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경명 교수 부인이 백마사에서 멋지게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 

시리즈를 마치면서 끝으로 중국무술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중국무술에는 저마다 많은 무술요결들이 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술에서 무공으로 가느냐, 못 가느냐로 구분되다. 소림권, 태극권 등 각종 무술 또는 권법에서 통용되는 요결(要訣)중 하나가 내외상합(內外相合)이다.

언뜻 보기에는 별 내용이 없어 보이지만 깊은 해석을 하여 보면 모든 권법은 “동작”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작(動作)에는 겉 동작과 속 동작으로 구분된다. 소위 겉 동작은 같아도 속 동작은 다르다. 그래서 ‘상대를 볼 때 겉은 알아도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내외상합(內外相合)은 겉과 속이 하나라는 뜻이지만 달리 해석을 하면 권법(拳法)에는 몸으로 표현(套路)하는 외형(外形)이 있고, 내형(內形)의 비결(秘訣)이 있다. 여기서 속빈 강정의 동작이 아니라, 비결(더 발전되면 심결이라고도 함)을 통한 그 동작이야 말로 절대권법 즉 무공(武功)인 것이다. 현재의 모든 동작을 내가 해석 해볼 때 겉 동작은 완성이 될지는 몰라도 속 동작의 완성은 없고, 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속 동작을 배우기 위해서 다음 여행을 준비해본다. 다만 요즘 들어 중국여행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무술고수인 명사(名師)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남기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그동안 열독해주시고 성원해주신 애독자 여러분과 세종의 소리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중국 대륙의 저녁에 화사한 꽃 나무아래에서  다음 무술기행을 기약해보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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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진 2015-08-21 17:51:22
멋진 역사기행에 무술에 대한 통찰 잘 배웠습니다. 관장님은 10년이 흘러도 그모습 그대로시네요.

라파엘 2014-09-16 21:35:10
내외상합,,, 겉동작 속동작.. 속을 채워야 하는데 그길이 심오하여 저절로 숙연해지고 겸손해져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글 아쉽고 감사했습니다...

아쉽 2014-09-14 21:15:10
아쉽네여. 후속편 또 있나염

오호 2014-09-10 23:19:11
마지막글이네요 그 동안 정말 잘읽엇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잇으면 한번더 쓰시면 좋을것같네요
책으로도 한번 써보세욯ㅎ

나라한 2014-09-10 22:59:07
관장님 저널을 보면서 또 한수 배웠습니다. 그 동안 투구하신 글을 읽으면서 저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교양도 쌓을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