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충,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충,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이정우
  • 승인 2014.08.14 1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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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흔적없이 사라진 최고 서원 '봉암서원'

   한충 묘역
세종시를 대표하는 서원중의 서원은 연서면에 있던 봉암서원(鳳巖書院)이다. 이 서원은 1651년(효종 2)에 지방유림들이 기묘사화 이후 2년 뒤에 기묘사화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신임사화 때 절명한 송재 한충(韓忠;1486-152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다. 그 뒤 1662년(현종 3)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추가로 모셨고, 1686년(숙종 12) 송준길(宋浚吉;1606-1672), 1721년(경종 1)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면서 서원의 규모와 내용이 확대 되었다. 또 그런 가운데, 1665년(현종 6)에 사액을 받아 명실상부한 국가공인의 서원으로서, 선현에 대해 제사하고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중요기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고, 아쉽게도 그 이후로 복원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까지 터만 남아 있다.

한충을 제향하는 사당이 건립된 것은 1651년보다 이른 시기였다. 한충의 저서인 <<송재집>>의 ‘년보(年譜)’에 보면, 1645년(인조 23)에 ‘연기지역의 사림들이 선생을 기념하여 연기현의 반계(磻溪)라는 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시작하였다’고 했다. 이때의 명칭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반계사우라고 하였지 않았을까? 또 건립한 자리도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 반계라는 자리에서 옮겨 1651년 서원을 건립했고, 다시 분명하지 않은 어느 시기에 이전을 하였다. 조복양(趙復陽;1609-1671)이 쓴 <봉암서원이건상량문(鳳巖書院移建上樑文)>에 보면, 원래 서원은 ‘강위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지세가 높고 험하며, 항상 비바람이 심하였다. 그래서 오른쪽의 평탄하고 넓은 땅으로 새로 경영하였다’고 하는 데서 서원을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래의 서원자리는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비바람이 강하지 않은 평탄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이 위치한 곳은 미호천, 월하천, 봉암천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경관이 뛰어난 산이다. 이름도 봉황산이다. 이 산이 있는 곳은 세 개의 하천이 모여 흐른다. 하류로 약 6㎢정도만 내려가면 세종의 젖줄인 금강이 흐른다. 그리고 산세는 금북정맥의 줄기가 서북으로 굽이쳐 끝없는 산자락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서원이 위치한 봉황산의 주변은 물이 풍부하니 물고기도 넉넉하려니와, 이런 곳에 사는 봉황새는 먹이에 굶주리지 않으리라. 또 그런 돌과 흙이 넉넉한 산줄기는 봉황새의 뼈와 살을 굳건히 하고, 그 자식을 잘 품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터전은 천년의 땅임을 약속하는 자리인 것이다.이런 봉황새의 산에 봉암서원이 자리했으며, 그 봉황새의 산중에서도 서원이 자리한 곳은 봉황의 머리였다. 봉황새 산의 우두머리에 자리했던 것이다.

   한충 글씨

한충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제사하기 시작한 사우를 봉황새 산에 건립한 8년 뒤 그 여세를 몰아서 1659년 나라에 사액을 청하였다. 그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659년(현종 즉위년) 연기의 유학 성진형(成震炯)이 상소하여 “고 유신 한충의 서원에 사액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서원에 사액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니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고 하여 사액이 거절되었다. 그러자 연기의 유생은 몇 년 뒤, 30 여 년 전인 1631년(인조 2)년에 타계한 호서지역 대표적인 학자 중의 한명인 김장생을 1662년에 추가로 이 서원에 봉안하였다. 김장생을 봉안한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나 학문적 차원에서 그가 명망이 있으며, 그의 제자들이 중앙정계에서 현실적으로 중요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던 것을 활용하고자 한 점이 고려되었다고 보여 진다.

봉암서원이 국가적 규모와 권위로서의 사액서원이 된 것은 김장생을 제사한 3년의 뒤였다. 1665년(현종 6) 봄에, 연기유생 민후건(閔後騫;1571~?) 등이 서원에 사액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5월에 특별히 사액을 내렸는데 이름을 봉암(鳳巖)이라 하였다. 또 뒤에 한충은 청주의 신항서원에 추가로 제향 되었다. 이 서원의 이름을 봉황서원이라고 하지 않고 봉암서원이라 한 것은 봉황의 머리에 있는 서원이란 뜻이 강했으며, 실제로 이 서원이 암반위에 올라앉아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봉황이란 명칭은 유학보다도 불교나 도교적인 색채가 짙은 명칭이었으므로 유학자들은 봉황보다는 봉암을 채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의 수선지지 봉암서원에 제향된 한충, 그는 누구인가? 한충은 1486년(성종 17) 병오 병신월(7월) 기해일 을축시에 태어났다. 그는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펼쳐는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었다. 인생의 궤적을 크게 남기고 1521년(중종 16) 11월 22일에 돌아가니 나이 36살이었다. 짧고 굵게 살다가 간 삶이었다. 실로 한충은 ‘높이 날 수 있으되, 열매를 취하기가 어렵고, 또 그 힘이 약하여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분이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원인은 1521년(중종17 신사년)에 안처겸 등의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10월 11일 송사련·정상 등에 의해 제보되어 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기묘사화 때 사림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 심정·남곤 등을 안처겸이 제거하자고 했는데 그것이 실패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한충은 이 여파로 체포된 뒤 11월 3일(<<송재집>>의 년보에서는 11월 22일) 밤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충의 주검은 다음해 정월에 청주시 서면(현재의 옥산면) 동림산(東林山) 계좌(癸坐) 언덕에 장례지내 졌다. 그러다 1568년(선조 1) 연기 북면 산양동(山陽洞) 자좌(子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세종시 연서면 고복리 산양동 언덕이다. 그 뒤 1590년(선조 23)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도록 한 ‘종계개정’에 큰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 1등공신’이 되었다. 일찍이 1518년(중종 13) 7월 한충이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농간에 의하여 잘못 기록된 것을 정정해 주도록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는데, 그것이 고쳐진데 따른 공훈의 인정이었다. 1746년(영조 22) 9월에는 김재로가 한충에게 상을 내리기를 청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1804년(순조 4)에는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봉황정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
한충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그가 교류한 사림파 인물들이 그러하듯 기존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학문을 주장했다. 국정운영, 인재양성, 사회제도의 운영 등에 새로운 것을 과감히 수용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향촌교화와 관련한 ‘향약의 시행’과 국왕에게 상소한 ‘농정의 폐해와 이에 대한 개혁’을 들 수 있다.

한충이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했던 향약은 원래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중국 북송 말기에 산시성 란톈현 (陝西省 藍田縣)에 살며 유학을 학문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여씨(呂氏)성을 가진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네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고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가지 조목을 내걸고 향촌자치를 실천했다. 이것이 <남전향약>> 또는 <<여씨향약>>이다. 그 후 송나라는 북방세력에 밀려 남중국 지역으로 이동하니 이를 남송이라고 한다. 남송 때 안후이성(安徽省) 출신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 전근대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유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1130 ~ 1200)가 여씨향약을 더하고 빼서 만든 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이다. 이후 이 향약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조선중후기 지방사회 자치 규약의 하나로 자리하였고, 이상적인 향촌질서 구축의 표본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향약은 비록 외형의 틀은 중국의 <<여씨향약>>이 수용된 것이긴 하나, 그 운영 방식에서 오히려 우리사회에 형성된 공동체의식과 아름다운 생활양식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향약은 시행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특히 지역별로 그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여 그 지역에서 만 실시되는 내용들이 있어 그 독특성이 더 했다.

1. 덕업상권은 좋은 일을 서로 권하는 것이었다. 착하게 행동하며, 집안의 부모님들과 형제 일가친척 뿐 아니라 마을의 윗사람을 잘 섬기며, 밖에 나가서는 벗들과 화목하며, 법령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2. 과실상규는 나쁜 일은 서로 규제하고 억제하는 것이었다. 음주, 놀음, 싸움, 행동불순 등을 제재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 조목은 농업문제와 관련한 분쟁의 해결, 지역 공동체 내에서 시정할 사항이 있는 사람에 대한 규제 등으로 작동하여 향촌사회 공동체 유지와 관련한 현실적 요소가 반영되었다.
3. 예속상교는 예절을 지키며 서로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예절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서로 만나고, 방문하고, 마중하며 배웅하는 것을 부드럽고 평안하게 하며, 마음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따뜻하게 전해지는 그런 교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서로 잘하자는 것이었다.
4. 환난상휼은 근심이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서로 돕자는 것이었다. 물이나 불로 인한 재난을 당했을 때, 도둑을 맞았을 때, 질병에 걸려서 아플 때, 돌아가신 분이 생겼을 때,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되었을 때, 가난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할 때,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서로 도와주자는 것이었다.

   봉암서원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라다 본 세종시 신도시. 멀리 원수산이 보인다.
곧 우리나라의 향약은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지켜야 하는 약속이며, 서로의 어려운 현실을 도와주고 상호보완을 이뤄 내는 일종의 생활양식이었다. 이런 속에서 마을의 평안이 유지되고, 사람들 간에 다툼이 없으며,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마을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향약에 대해서 한충은 충청감사가 <<여씨향약>> 책을 간행해서 지방의 선비들에게 가르쳐, 선비들로 하여금 향촌 교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고 그를 높이 칭찬하였다. 그러면서 향약시행에 있어서 “고을에서 높이 존경을 받으며 경험이 풍부하고 학식과 견문이 넓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뽑아서 도약정(都約正)과 부약정(副約正)의 자리에 앉히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고을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고을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향약의 운영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관리들에게 <<여씨향약>>을 나누어 준 것과 같이 지방의 유향소에도 이것을 나눠주어 백성들이 알고 실천하게 하자”고 국왕에게 제의 하였다. 또 “<<향약>>을 지방에서만 실행할 것이 아니라 수도인 한양에서도 실시하자”고 하였다. “경성 안에도 또한 마을이 있어 반드시 향약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을 오부(五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 동(洞)의 약정(約正)에게 나누어 주게 하자”고 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아내었다.

봉암서원이 자리한 봉황산에 올라 멀리 주변을 바라다보았다. 멀리 남쪽으로 세종청사의 뒷산인 원수산이 보이고, 동쪽으로 광활한 미호천의 물줄기와 주변의 녹음이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봉암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류형국(柳亨國)이란 선비가 건립하였는데 지금은 훼철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봉암서원과 봉황정은 서로 연관성이 있던 건조물이 아니었을까?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현재 전근대 전통사회에서 세종시 유학의 수선지지이고 세종시 교육의 산실이었던 봉암서원은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 선비들이 공부하다 쉬었을 봉황정은 자취도 없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겠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세종시의 주인인 우리가 봉암서원 자리에 세종교육의 새로운 상징으로 작은 기념물이라도 건립하면 어떨까? 또 선비들이 공부하다가 쉬며 주변경관을 감상하고 풍류를 즐겼을 봉황정도 복원하여 시민들이 쉬고 주변을 감상하며 선인들의 기개를 느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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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인 2014-08-18 09:22:18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깊이 있는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