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마음 버리고 협객으로 살고 싶다"
“거만한 마음 버리고 협객으로 살고 싶다"
  • 김장수 유성태극권전수관장
  • 승인 2014.07.15 14:49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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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무인들, 중국무술 고향가다 <4> 향산사와 백거이의 수행

 백거이는 말년에 향산에서 수행하다가 입적했다. 백거이 묘인 백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향산사는 하남성 낙양 이하(伊河)강 서쪽의 용문산(용문석굴)과 반대편에 위치한 동쪽의 향산(동문석굴)에 위치해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용문석굴만 관광하고 동쪽에 있는 동문석굴과 향산사는 제대로 관광을 하지 않는다. 중국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저 먹고 자고 겉만 스치듯이 보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처음에 겉을 봤다면, 다음은 속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향산사를 10년 전에 찾았을 때와는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첫 번째보다 두 번째로 찾은 향산사에서 구석구석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향산사에는 당나라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일화가 많은 곳이다. 서기 766부터 826년까지 살았던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백거이는 용문산수에 마음을 두고 18년 간 살면서 향산거사로 자칭했으며 말년에 향산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고인이 되어서도 향산에 묻혔다. 詩仙(시선)이라 칭하는 이백과 詩聖(시성)으로 칭하는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시인 중 한 분인 시인 백거이는 불교에 귀의한 居士(거사:남자 신도 중 공부를 하여 지혜가 터진 사람)로 유명했고, 뛰어난 경륜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백거이가 본래 학식과 총명이 뛰어난데다 벼슬이 자사의 지위에 올라 자못 그 우월감에 충만해 있었는데 항주태수(杭州太守)가 되었을 때, 하루는 그리 멀지 않은 과원사에 도림선사(道林禪師:741-824)라고 하는 이름난 고승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거이가 내가 한번 직접 시험해 보리라 작정하고 선사가 머물고 있다는 절로 수행원을 거느리고 찾아 갔다.

“명리와 욕심으로 가득 찬 속세의 땅보다 나무 위 새집이 더 안전”

  시인이며 정치가로 당시대를  풍미한 백거이의 초상화
도림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위 새집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해서 ‘새의 집’이라는 뜻으로 조과선사(鳥窠禪師)라고도 불리웠다. 백거이가 절에 가서 선사를 찾으니, 도림선사는 나무 위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이에 백거이가 "선사님, 나무 위는 위험하니 어서 내려오십시오" 라고 하니, 도림선사는 “당신이 서있는 땅 위보다 내가 앉아있는 나무 위가 더 안전하다" 라고 대답하며 명리와 이해가 엇갈리는 속세가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 주었다.

이에 백거이는 다소 공손해지며 ‘가르침을 받으려 왔다“고 하니. 선사는 찾아온 손님이 다름 아닌 태수라는 고위관료인지라 마지못해 나무에서 내려가 방장실로 안내하며 "그래, 어찌 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고?"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백거이가 "평소에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 한 구절을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도림조과선사는 학식이 뛰어난 백거이가 좌우명을 삼을 만한 법문을 요청하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라는 게송을 써주었다.

백거이는 그 게송을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듯이 “선사님! 그것은 세살 난 어린이도 아는 너무나 쉬운 말입니다"라고 비웃었다. 그러자 도림선사는 "세살 난 어린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라고 일갈하였다.

거만하게 물었다가 무안해진 백거이는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란 걸 크게 깨닫게 되어, 공손히 절을 하고 과원사를 물러갔다. 그 후 백거이는 148명의 가까운 사람들과 ‘상생회(上生會)’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같은 자세로 좌선하고 내세에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백거이는 말년에 벼슬자리를 내놓고 18년 동안 향산사에 머물며 자신 스스로 향산거사라 칭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향산사를 중수한 뒤, 불광(佛光). 여만(如滿)선사가 향산사 주지가 되는데 일조했다. 여만선사 등과 함께 9명이 구노사(九老社)를 결사하고 향산사에 모여 시를 지으며 친교를 다졌다. 몇 년 후 여만선사가 먼저 열반에 들자, '구노사' 도반들은 향산사에 묘탑을 세웠다. 그 후 몇 년 지나 백낙천도 죽음에 이르러 ‘여만선사 묘탑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에 따라 846년 여만선사 옆에 묻혔다. 현재 여만선사의 묘탑은 없어지고 백거이의 묘만 존재하는데 그 묘를 백원(白園)이라고 칭하고 있다.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가 자주 올랐던 석루 앞에서 이번 중국 기행단의 한 분이 감회에 젖어 있다. 
향산사 경내에 돌로 만든 누각인 석루(石樓)가 있다.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는 이곳 누각에 올라 건너편 용문석굴(奉先寺)를 바라보며 많은 문인들을 불러 모아 용문시회를 열러 시를 짓게 하고 우수한 자에게는 즉석에서 금포(錦袍)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장개석 별장(蒋宋别墅)이 있으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아내 송미령의 성을 딴 蒋宋别墅(장송별장)에서 그 역시 장엄한 석굴을 바라보며 신세계의 중국을 구상했지만 모택동에 밀려 대만으로 갔지만 석굴 앞 위상은 감개무량하다.

나는 이곳에서 백거이가 향산거사라는 불자였지만 백거이 자신의 관리를 또 다른 역사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우선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태백, 두보, 백거이를 나름에 시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조명해보았다. 이태백은 노장사상이 바탕이라면, 두보는 전통적인 유가사상에 비유되고, 백거이는 당연히 불교에 심취한 불교사상을 드러냈다고 보았다. 백거이의 묘인 백원(白園)에서 중화사상이 당시 불교와의 흡수철학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인상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백원(白園)에서는 불교적 색채는 찾아볼 수 없고 나의 생각과 다르게 중국특유의 찻집과 낭만적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무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비문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왼쪽은 일본문화 영향을 가장 많이 미쳤다는 문구의 비와, 오른쪽에는 우리나라의 백씨 종친회에서 백거이가 백씨종친이라는 비가 있다. 비교해 볼 때 용문석굴은 한마디로 걸작이다. 하지만 인간적이지는 못하다. 오늘날에 보면 상업적, 기술적, 예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백원(백거이의 무덤)은 인간적이며 자연적으로 순수한 그 자체이다. 종교적 바탕은 거의 없고 차나 마시면서 풍류나 도를 나누는 포근한 장소이다. 향산산장 찻집에서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앞에는 용문석굴이요 동쪽으로는 동문석굴이며 동쪽 끝 모서리에는 백거이의 무덤 백원이 있다. 따라서 향산사는 사전정보를 알고 가면 더 많은 정보와 재미나는 이야기와 중국의 역사적 중심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거이와 여만선사 등 아홉명이 말년에 구로당에서 시를 지으며 같이 모여 공부를 했다.  
중국에는 강호(江湖)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뜻의 강과 호수이다. 세상에는 강과 호수가 없는 곳이 어디 없겠는가? 하지만 중국은 좀 다른 것 같다. 아직까지도 강과 호수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많이 모인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그렇다 보니 차와 술과 음식, 문학, 철학, 풍악, 무술 등이 발전한다. 그래서 그 중심을 중원이라고도 하며 그곳에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을 협객(俠客) 또는 삼절공자(三絶公子)라 한다.

문무 겸비, 의협심이 강하고 음악, 바둑, 예술 알아야 협객이라고 칭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협객은 아무나 문무를 겸비했다 해도 협객이라고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무는 물론 의협심이 강할 때 비로소 협객이라 칭한다. 그리고 중국무협영화를 보면 공자(公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또한 공자라는 말은 중국 언어로 많이 쓰인다. 그 뜻은 귀족집안 자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 도련님과 같은 비슷한 뜻이다. 무협에서는 삼절공자 또는 공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삼절(三絶)은 특히 중국의 모든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데 무협에서는 금(琴),기(棋),예(藝)로 사용한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갈다. 금(琴: 음악을 할 줄 안다) 기(棋: 바둑을 둘 줄 안다) 예(藝: 예술을 할 줄 알아야 된다)를 할줄 알아야 삼절공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림의 고수(高手)에서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음악을 통해 리듬(요즘 우슈 태극권 투로시합에서 음악과 함께 표현한다)을 배우고, 바둑에서 인내(忍耐)와 장고(長考)를 배우고, 예술에서는 품위와 동작(套路: 정해진 연무동작)에서 예술성과 멋진 자세가 나올 때 비로소 삼절공자 또는 공자라는 호칭을 듣는다.

그 옛날 향산에서 도림조과선사가 “세 살 어린이도 알지만 팔십 노인도 실천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통으로 얼룩진 사바세계의 중원을 평정하고 그 곳에서 풍유와 낭만을 즐기며, 때로는 의협심으로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며, 다양한 예술을 통해 심신을 다스리는 협객, 삼절공자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향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망중한에 젖어 보았다. 

향산사의 종루에서는 은은한 종소리가 이하강을 건너 맞은편 용문석굴까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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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2014-08-02 13:00:32
진정한, 멋스러운 여행이군요.

오유정 2014-08-01 14:18:04
김관장님의 그간의 발자취가 느껴집니다

준윤 2014-07-24 21:40:25
중국 문화에 깊은 지식과 이해를 갖고 쓰신 글에 많은 자극이 됩니다. 풍류와 예술과 의리를 키우며 과거 중국중원을 한번 호흡해 보고싶게 하십니다. 그려~~~~~~~

김성환 2014-07-22 11:45:48
'백거이', '삼절공자 ?' 짱입니다.
잘 모르지만 익숙하게 봐오긴 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7월차 수련생

따라랍 2014-07-21 22:45:17
따~~ 봉~
멋지네요! 다음 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