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은 왜 단종을 선택했을까
박팽년은 왜 단종을 선택했을까
  • 이정우
  • 승인 2014.07.03 09: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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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세종]박팽년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하>

   세종시 장군면에 위치한 김종서 장군 묘역. 장기군이 세종시로 편입되면서 장군면으로 변경하는 데 김종서 장군 묘소가 크게 작용했다.
박팽년( 1417~1456)을 중심으로 한 사육신들은 왜 세조를 선택하지 않고 단종을 선택했던 것일까? 외형적으로는 불사이군의 의리, 유학적 명분의 문제 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정치세력간의 갈등과 경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박팽년 중심의 사육신 세력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국운영을 장악하면서부터 권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박팽년이 기대고 있던 단종-혜빈양씨 로 이어지는 왕실라인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수양대군-한명회로 대표되는 세력이 왕실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였고, 그들이 확실하게 세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곧 박팽년은 한명회 세력에게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신하들 내부에서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면 이해의 실마리가 풀린다. 원래 수양대군이 1453(단종1)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 박팽년·성삼문으로 대표되는 사육신 들은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이 제거된다면 사육신파들이 승진하고 기회를 잡을 것이고 인사권과 정국운영의 주도를 장악 할 라는 계산이 섰던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육신파는 김종서파의 제거에 대해서 수양대군에게 묵시적 동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서가 제거된 후 그 논공행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육신 측 관료는 배제되기 시작했다. 박팽년과 사육신 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조정의 운영이나 자신들 주도의 정국운영은 바람을 타고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박팽년과 사육신은 수양대군에게 배려는 고사하고 홀대를 당하였다. 관직을 배정받는 직위를 분석해 보자. 1453년 계유정난이 끝난 후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의 관직을 올려 제수했다. 이 논공행상에서 훗날 단종복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도 전체 82명 가운데 포함되긴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박팽년 승정원 우승지(정3품), 권자신 승정원 우부승지(정3품), 성삼문 좌사간대부(정3품), 이개 집의(정3품), 유성원 수사헌 장령(정4품), 성승 충청도 병마도절제사(종2품)에 불과했다. 박팽년과 사육신은 그 어느 누구도 중앙관직에서 판서가 될 수 있는 정2품의 장관직 자리에 배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 논공행상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박팽년 세력에 대한 세조-한명회 라인의 홀대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455년(단종3) 윤 6월 11일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은 외형일 뿐 실제로는 세조가 단종을 상왕으로 내 몰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인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8월에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국왕이 중심을 이루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다. 마치 시대상황이 태종 이방원의 시대로의 회귀한 것과 같았다. 이런 국정운영방식에 사육신 세력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소용이 없었다.

또 세조가 왕이 되는 데 공헌한 사람을 기리는 사람을 좌익공신(佐翼功臣)이라고 하여 포상하였는데 포함된 사람은 모두 43명이었다. 그런데 이중에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포함된 것은 몇 명에 불과했다. 2등에 엄자치, 3등에 성삼문과 권자신이 전부였다. 곧 피동적으로 구색 갖추기로 포함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성삼문이나 권자신은 실제로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명단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곧 세조의 집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던 학자 그룹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대승적 명분상 배려했던 것에 불과 했다.

 
이렇게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지, 조정의 주류를 누가 형성할 것인지를 놓고, 조정의 신하들은 새로운 왕인 세조를 지지하는 이들과 세조에 반감을 갖는 이들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크게 세조의 즉위를 인정하는 파와 세조의 즉위를 부정하는 파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런 신하들 간의 정국운영 주도권과 정치세력 확장의 문제 뿐 아니라, 여기에 왕실내부에서 사람들 간 경쟁과 암투가 있었다. 단종-혜빈양씨-박팽년으로 이어지는 세력과, 수양대군-정희왕후 윤씨-한명회로 이어지는 세력 간의 갈등이었다. 박팽년이 중심이 된 왕실라인과 한명회가 중심이 된 왕실라인의 갈등이었다.

박팽년이 형성하고 있는 국혼의 혼맥은 수양대군의 정권장악이전에는 최대의 실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팽년의 사위중의 한명이 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 1434년(세종 16)~1457년(세조 3))이 었다. 그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혜빈양씨이다. 그의 모친인 혜빈양씨는 비록 세종의 정비는 아니었으나,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세종28) 승하한 이후로는 실지 왕비의 행세를 하였다. 세종이 새로운 정비를 들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지만, 자신보다 앞선 영빈강씨(令嬪姜氏 : ?~?)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존재감이 없었다. 그렇단 얘기는 신변상 건강이 좋지 못했다거나, 정치적인 움직임이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신빈김씨(愼嬪金氏 : 1406~1464(세조10))는 출신 상 힘이 없던 하층 출신으로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신빈은 아버지가 김원(金元)이란 자였으며, 그녀는 본래 내자시 여종이었다. 그런데 1418년 신빈김씨가 13살이 될 때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발탁하여, 중궁이 된 소헌왕후 민씨전으로 보내져 궁녀가 되었다. 소헌왕후가 내자시 여종이었던 궁녀 김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던 것에 감복했기 때문에 자신이 데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궁녀 김씨는 대비인 원경왕후과 왕비인 소헌왕후를 섬기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런 심성에 반하였는지 세종은 궁녀 김씨가 30세 되던 해인 1435년(세종17) 그녀를 취하여 후궁으로 맞이하였고, 영해군 이장(李璋)을 낳게 되니 신빈이라 책록 하였던 것이다.

신빈은 후에 소의(昭儀)가 되고 1439년(세종21) 1월 27일 귀인(貴人)이 되었다. 세종이 승하한 후에 신빈 김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 승려가 되었다. 단종이 즉위한 후 환속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곧 세종대왕의 여러 여인 가운데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한 이후로 혜빈양씨 이전의 세종의 여인 중에는 권세를 부리거나 그런 배경을 형성한 여인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혜빈양씨가 정비인양 권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계유정난이 가져온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출처 : KBS 역사 스페셜>

한편 임금이 승하하면 그를 모시던 죽은 왕의 여인들은 모두 궁궐 밖으로 나가서 거주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세종을 모셨던 숙원이씨(淑媛李氏), 상침송씨(尙寢宋氏)등은 모두 대궐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혜빈양씨는 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혜빈양씨는 단종에게 젖을 먹여가며 보육했던 사실상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왕실의 슬픈 가족사가 있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안동권씨(顯德王后 ; 1418년(태종 18)~1441년(세종 230)는 아들 홍위(단종)를 낳은지 3일 만에 산난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갓난아기 홍위는 족보상으로 할머니인 혜빈양씨가 키우게 되었다. 곧 혜빈양씨는 단종에게 있어서 할머니이자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바로 이런 공이 인정되어 혜빈양씨는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된 것이었다.

혜빈양씨는 이런 외에서 본관이 청주사람으로 충북 청주에 근거가 있던 청주지방 토호의 사람이었다. 청주양씨는 중국 원나라 사람 양기(楊起)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양기는 원나라와 고려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려를 위해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으로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고, 청주(淸州)지방의 전토와 관적을 하사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삼았다. 이런 그녀 가문의 고려말 대 중국과의 외교적 활동과 그 관계의 형성은 뒷날 조선왕조 개국 후 청주한씨가 대명외교를 담당하는 중심에 서게 되는 연결고리 내지는 발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혜빈양씨는 단종에게 세종의 3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술사인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 방룡소흥(旁龍所興)의 자리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으니, 안평대군의 책동을 미리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현로는 세종의 적장자(문종)가 아닌 방계의 아들 중에서 임금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안평대군을 감화시켜서 운기조식(運氣調息) 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정해서 건물을 지으라고 권하였다. 이에 따라 실제로 안평대군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19-4번지에 무계정사를 건립하여 이현로의 이론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혜빈양씨는 이렇게 왕위자리를 넘보는 세력이 있음을 단종에게 일깨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혜빈양씨는 단종에게는 절대적 깨우침을 주는 선생님과도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런 단종의 유모이자 실제적인 어머니이자, 정치적 스승인 혜빈양씨의 3째 아들 영풍군 이전(李瑔)이 박팽년의 사위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박팽년의 혜빈양씨와의 사돈관계 형성은 박팽년에게 막강한 권력이 장악될 것임을 반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상황에서 혜빈양씨는 실제적인 수렴청정을 하는 국모나 다름이 없었다. 단종은 결혼도 하지 않는 상태의 9세의 나이에 즉위하였고, 14살에 정순왕후 여산송씨와 1454년 2월 19일(음력 1월 22일)에 결혼을 하였다.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보다 한 살 많은 나이였지만 국정운영에는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친정아버지 송현수(宋玹壽)는 수양대군과 친구로 지내는 사이 이긴 했어도 정치적으로 큰 실세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단종의 어머니와도 같은 할머니 혜빈양씨는 단종의 부인을 한미한 가문에서 발탁하여 자신과 자신의 지지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고 국정운영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혜빈양씨의 권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실제적인 수렴청정과 같은 형태의 권세행사와 태상왕 대비의 권력을 행사하는 실세가 되었던 것이다.

또 단종의 외삼촌이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오라비인 권자신 (權自愼 ?~1456년(세조 2)은 혜빈양씨와 박팽년의 세력에 가담하여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런 관계 하에 조정에는 혜빈양씨-단종-박팽년-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사육신 학자로 라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대해서 수양대군-수양대군의 부인 파평윤씨(정희왕후 윤씨)-한명회로 이어지는 라인관계를 보자. 한명회가 세조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특출함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이미 가문적으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한상질(韓尙質)은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왔던 사람이며, 작은 아버지 한상경(韓尙敬)은 조선 개국공신이었다.

   극중 드라마 속 한명회.<출처 : KBS 역사스페셜>
비록 한명회 본인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시절은 보냈지만, 청주한씨 가문은 중앙정계에서 비중 있는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한명회의 집안사람인 한확(韓確)의 큰누이가 1417년(태종 17) 5월 9일 명나라 태종 영락제의 제1후궁 공헌현비(恭獻賢妃) 일명 려비(麗妃)가 되면서부터 확실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려비가 명나라 황제의 후비가 되면서 청주한씨는 대명외교의 실세로 부상하였다. 특히 이런 가문의 흥기를 한확은 확실하게 활용하였다. 한확은 자신의 둘째딸과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과 혼인을 맺어 국혼을 이루었다. 이로써 한확은 명왕조와 조선왕조에 걸쳐 혼맥을 형성하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1427년(세종9) 5월 1일에는 영락제의 손자이자, 명나라 5대 임금으로 등장한 선종 선덕제도 자신의 후궁으로 려비의 여동생인 한계란(韓桂蘭)을 맞이하게 되면서 한확의 대명외교장악과 중앙정계에서의 외교적 실세로서의 위상은 더욱 굳어지는 형국이었다.

한확은 대명외교에서 부동의 일인자에 서게 되었다. 더욱이 한확은 1455년(세조1) 7월 26일 자신의 6명의 딸 가운데 막내딸을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 도원군 이장(懿敬世子 桃源君 李暲, ; 1438-1457)과 혼인을 시켰다. 곧 자신은 왕의 사돈이 되었고, 딸은 세자빈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확은 자신의 외손자가 왕이 될 것이며, 예약된 왕의 외할아버지가 될 것이니 따라서 그의 정치적 권세는 예약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뤄지질 않게 되었다. 한확도 이듬해 죽고 의경세자도 왕이 되기 전에 죽었으니 말이다. 어찌하였거나 이런 한확이란 사람이 한명회의 일족으로서 한명회의 배경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가문적 후광 외에 한명회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의 예리함과 정확함도 한명회의 출중함을 빛내주는 것이었지만, 그 역량에 힘을 보탠 것은 수양대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였다. 정희왕후는 윤번(尹璠 또는 磻 :1384(우왕 10)∼1448)의 딸로 1418년 충청남도 홍주군의 관아에서 태어났다(그녀의 태실은 홍천에 있는데 이를 두고 홍천관아 태생이라고 홍천사람들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1428년(세종 10)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의 정5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딸이 1428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1417-1468)의 부인이 되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의 종3품으로 승진하는 정도였다. 정희왕후가 수양대군과 결혼할 당시에 수양대군의 나이가 12살이었고, 그녀의 나이 11살이었다.

수양대군과 정희왕후의 결혼에 대해서는 <<송와잡설(松窩雜說)>>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래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논의 되던 사람은 윤번의 딸이긴 했으나 원래 정희왕후가 아니라 그 언니(뒷날 한명회의 6촌인 한계미와 결혼 하였다.)였다는 것이다. 윤번의 딸과 수양대군과의 혼담을 나누기 위해 궁중에서 감찰각시가 윤번의 집을 방문했을 때 정희왕후도 그 언니와 함께 동석했다고 한다. 당시에 정희왕후는 11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지만 행동이나 말솜씨가 언니에 비해서 나무랄 것이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사뭇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감찰각시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언니를 제치고 동생인 정희왕후를 수양대군의 배필로 선택했다고 한다. 곧 정희왕후는 언니를 제치고 왕비자리를 꿰 찼다는 것이다. 이는 곧 왕의 자리를 수양대군이 단종을 제치고 꿰찬 것과 같이 그 아내도 언니를 제치고 왕비의 자리를 꿰찼다는 것을 비유하는 뭇 사람들의 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묘하다.

어찌하였거나 수양대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집안은 그리 권력가문도 아니고 명문세력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부인은 무술년 갑자월 정사일, 음력 11월 1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운명이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그녀는 ‘모든 이의 중심에서 새로운 일을 바다와 같이 넓게 실행하고, 그리고 잽싸게 처리 할 수 있는 배포의 기운 갖고 태어난 사람’ 이었다. ‘지극히 오랜 세월 남몰래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자신의 영광을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남편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러 갈 때 주저하며 가기를 망설이자,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승리할 것을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맞을 것이다. 또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는 것과 단종을 영월로 유배를 보내어 제거하는 것에도 그녀가 깊이 관여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 것을 보면, 분명 배포 있고 야심 있는 여인이었다.

수양대군의 부인 윤씨부인은 남편 수양대군의 책사이자 가신인 한명회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우선 그녀의 언니는 한명회의 6촌 동생인 한계미(韓繼美 1421(세종 3)∼1471(성종 2) )의 부인이었으니, 이들은 방계사돈 관계였다. 또 이들은 정치적 파도의 변수가 일어날 때마다 같은 배를 타는 동지이기도 했다. 윤씨부인은 1450년(문종즉위년)에 자신의 큰아들 이장(뒤에 의경세자)과 한확의 딸 한씨( 뒷날 소혜왕후(昭惠王后) : 1437년 10월 7일(음력 9월 8일) ~ 1504년 5월 11일(음력 4월 27일))를 혼인 시켰다. 그런데 1457년(세조 3년)에 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며느리 한씨를 사가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남편인 세자가 죽어서 그런 것도 원인이었지만, 그 친정아버지인 한확이 1456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곧 그 친정아버지 한확의 죽음은 의경세자빈의 친정세력의 정치적 생명력이 다했다고 판단한데 따른 결정인 것으로 생각된다.

   청령포에 있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에 만들어진 단종
단종복위 운동이 발생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정희왕후와 한명회와의 정치적 결탁 관계는 혼인에서 그 실제적 모습을 더 드러내 주었다. 정희왕후 윤씨는 의경세자가 죽은 1457년 그해에 둘째아들 해양대군 황(海陽大君 晄)을 왕세자에 봉하고 1460년 세자빈의 아내로 세조의 정치적 책사이자 정희왕후 윤씨의 정치적 동지인 한명회의 딸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장순왕후(章順王后 : 1445년 2월 22일(음력 1월 16일) ~ 1462년 1월 5일(1461년 음력 12월 5일)이다. 곧 정희왕후 윤씨와 방계사돈 관계인 한명회가 직접사돈 관계를 맺게 된 것이었다. 곧 세조-정희왕후 윤씨-한명회로 이어지는 정치적 · 혈연적 트러스트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세자빈이 된 한명회의 딸은 세조와 정희왕후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1년 음력 11월 30일, 왕실의 적통인 원손 인성대군(仁城大君1461∼1463)을 낳았다. 그러나 장순왕후는 슬프게도 산후병으로 인하여 1461년 음력 12월 5일 요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원손 인성대군마저도 3살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정치적으로는 한명회-정희왕후의 승승장구였지만, 인간적으로는 한명회-정순왕후의 연속된 슬픈 가족사였다. 장순왕후와 인성대군의 죽음 등에 대해서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년(태종 18)~1441년(세종 23))의 저주 때문이라는 설이 있어 주목된다. 그도 그럴 것이 현덕왕후도 1431년 세자궁의 궁인으로 선임되었다가 1437년 순빈(純嬪) 봉씨가 부덕하여 폐비되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다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3일 만에 죽음을 맞이 했었다. 그러니 현덕왕후 권씨가 자신의 아들 단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세조와 그의 최측근 한명회에 대해서 죽어서도 한을 품을 수 밖에 없었지 않을까?

어찌하였거나, 한명회와 정희왕후 윤씨는 한명회의 딸이 죽은 뒤 해양대군의 차빈으로, 한확의 10촌뻘 되는 한백윤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원래 한백윤의 딸은 한명회의 딸인 세자빈이 1461년 죽은 후 소훈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모시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분이 안순왕후(安順王后 ; 생년미상~1498년(연산군 4)) 한씨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백윤 이란 사람은 성품이 넓고 검소한 사람으로 정치적 야심이나 욕망이 있던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한명회와 정순왕후의 정치적 목적과 속내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들은 실력 있고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은 국혼에서 배제시켰던 것이다.

한명회는 그런 한편 1467년(세조13)에는 자신의 딸인 장순왕후가 죽은 지 6년 뒤에 자신의 또 다른 딸을 세조와 정희왕후사이의 큰아들로 죽은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 사이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 뒤의 성종)과 혼인을 시켰다. 이분이 공혜왕후(1456년(세조 2)~1474년(성종 5) )이다. 이후 1468년 예종이 죽음을 맞자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한명회는 정희왕후 윤씨와 계책을 맺어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지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세력과 한명회를 중심으로 맺어진 국혼장악은 이들의 정치권력 장악과 정치권력 유지의 중요한 방편이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단종복위 운동의 내막에는 박팽년을 중심으로 한 조직과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간의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이들 세력은 서로 대비되며 대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는 친구였고, 동료였던 이들이 세월이 지나는 과정에서 분열되거나 대결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서로 좋았던 웃음도 따뜻했던 우정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신이 이겨야 한다는 목표와 내가 차지해야 한다는 목적이 남게 됨을 볼 수 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긴 3년 뒤인, 1456년 음력 6월 2일, 양력 7월 4일에 발생한 단종복위 운동. 결국 이 운동의 이면에는 정치세간의 갈등과 혼맥을 둘러 싼 인간의 갈등과 충돌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특히 2014년 6·4지방선거가 치러지고 새로운 지방자치와 교육이 7월 1일이면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승리한 이와 패배한 이를 위해 생각해 본다. 어떤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 것인가? 내편으로 만든 이들은 어떻게 관리하며 결집시킬 것인가? 지도자는 어떻게 말하며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 지도자는 어떻게 관용을 베풀며, 응징을 하여야 할 것인가? 후사를 위한 준비와 도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감이 교차하는 6월 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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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절곤 2014-08-23 21:37:06
박팽년 검색으로 귀한정보 감사히 보옵니다....................^^

박팽년 2014-07-07 17:03:19
매번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