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쿠데타, 그리고 잔인한 응징
실패한 쿠데타, 그리고 잔인한 응징
  • 이정우
  • 승인 2014.05.0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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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세종]박팽년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상>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 장릉.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말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세월호의 침몰로 온 나라가 비통해 있는 상황이다. 돌아가신 이들에 대해 삼가 명복을 빌며, 유가족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다. 본인은 지난 칼럼에서 박팽년을 다루면서 3월초에 운석이 떨어졌던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현대과학이 발달해서 운석이 로또라고도 이해하고 있지만, 역사 속에서 있었던 운석 떨어짐의 ‘성변’은 우리에게 역사를 되새기고 교훈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모두 아집과 자만 그리고 사욕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번 글은 지난번 기고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과 관련된 단종 복위운동의 전개과정, 그리고 박팽년가문에 대한 치죄의 내용, 그리고 박팽년이 단종복위 운동을 벌이게 된 속내의 역사적 성격을 상·중·하 삼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단종복위 운동은 1456년 음력 6월 2일, 양력 7월 4일 간지로는 병자(丙子)년 을미(乙未)월 경자(庚子)일에 성균관 관원으로 있던 김질(金礩)이 성삼문(成三問)의 집을 방문했다가, 성삼문이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 즉 단종)을 다시 세우자’고 하는 거사의 내용을 김질에게 말하고, 김질이 김질의 장인이었던 ‘의정부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을 포섭하여 같이 반정을 추진하자’고 털어놓은 내용을 세조에게 알리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이른바 ‘김질의 고변사건’이었다. 역모사건에 대한 변고가 있음을 아뢰는 내용이었다.

역모가 드러난 후 그 일당은 잡혀서 치죄를 받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박팽년은 세조가 묻는 질문을 하나 같이 답하였다.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이 모두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체로 임금님이 있던 어전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서서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반 이외에 별운검이라 하여 특별히 임금 옆에서 칼을 차고서, 마치 구름같이 임금을 보호하고 엄호하는 임시 경호원이자 임시 호위무사인 별운검이 있었다. 이 별운검을 단종복위 운동 세력이 장악한 것이었다.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소재한 박팽년 사우
그리고 “왕을 제거하는 시기를 언제 할 것으로 정했느냐?”고 묻자 답하기를, “어제(6월1일)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6월 1일의 연회와 그 실패의 내용이란 이러했다.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사신에게 선물을 주면서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그런데 이때 세조는 연회장소인 광연전(廣延殿)의 내부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당시 승지였던 성삼문은 승정원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내부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공간이 협소하니 ‘별운검’이 내부로 들어가지 말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각잡기>>에 보면, 사실 이날 별운검을 세우지 말라고 한 것은 한명회의 지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명회는 “창덕궁에서 연회가 열리는 광연전이 좁고 무더우니, 세자는 올 것도 없고, 별운검을 맡은 장수들도 전내에 들어오지 말게 하자”고 한 것을 세조가 받아들이면서 별운검이 세워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날의 세조 제거는 실패했던 것이다. 만일 이때 별운검이 들어갔더라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연회를 좁은 장소에서 열었고, 또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늘이 세조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명회의 동물적 감각과 특출한 지략에서 나온 것 이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연회 당일 성승이 칼을 차고 연회장에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이미 운검은 들이지 말라 하였다”라고 하여 가로막았다. 이에 성승이 물러나면서 한명회를 쳐 죽이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하여 만류하였다. 그래서 한명회를 제거하는 것도 실패하게 되었다.

또, 원래 세조와 세자를 맡아 처치하기로 했던 유응부가 그래도 들어가 치려 하자, 박팽년과 성삼문이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만일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에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때를 타서 거사하여 성공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며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유응부가 “일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오. 만일 후일로 미루면 일이 누설될까 두렵습니다. 세자가 비록 한자리에 오지 않았으나 그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어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지 성삼문은 “다음을 기다리자”고 하며 유응부의 행동을 만류하였다. 그리고 결국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일이 발각되고 난 뒤에는 유응부는 “조무래기 선비들과 같이 모사할 수 없었소.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박팽년 집터 표석,서울 중구 필동2가 80-2번지에 있다.
또, 신숙주를 맡아 제거하기로 윤영손(尹令孫)도 계획이 정지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신숙주가 한쪽 마루에 나가서 머리 감는 것을 틈타 칼을 가지고 제거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으나 성삼문이 눈짓하여 만류하였다. 그래서 신숙주도 제거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의 거사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역사는 승자 편이었던가? 승자가 이기게끔 프로세스가 작동되는 것이었던가?

이후 김질은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것을 보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서 “오늘 특별히 운검을 들이지 않고 세자도 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먼저 고발하면 부귀를 누리리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정창손이 그 말대로 김질과 함께 대궐로 달려가서 세조에게 변란을 고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 명 사신을 위한 잔치를 베푼 것은 6월 1일로 나오고, 김질이 고변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어찌 하였거나 이에 세조가 김질을 불러들여 그 진상을 추궁하자 김질은 “‘성삼문은 근일에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을 터놓고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의 예전 집에 왕래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이 상왕을 좁은 곳에 넣어두고 한두 명 장사로 하여금 담을 넘어 들어가서 상왕에게 몹쓸 짓을 도모하려는 것을 대비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또 ‘상왕과 세자가 모두 어리니, 만일 이 뒤에 세조 임금이 죽고 왕위에 줄서기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옳다. 꼭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장인이 수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장인에게 이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단종복위 운동이 단종과 금성대군이 연결되었고, 김질의 장인 정창손에게 영상자리를 주어 포섭하고자 했던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인 것으로 대입하자면, 성삼문은 6월 1일 이전에도 김질과 정창손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하고자 했었다. 김질을 끌어들이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김질의 장인 정창손은 세종이 추진한 사업에 대해 반대의견을 분명히 개진했던 의지가 강한 선 굵은 선비였다. 이런 사람을 단종복위 운동 세력으로 가담을 시키면 단종복위의 대의를 확보하는 데 힘이 실릴 것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이날은 어떤 날이었던가? 많은 무리를 거느리는 으뜸의 사람이나 조직이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시기이나, 강하고 부드럽게 확장하며 순리를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때였다. 역리를 하게 되면 실패하는 때였다. 그리고 울타리를 잘 쳐서 스스로를 보호내지는 방어를 잘해야만 되는 때였다. 곧 거사나 모사 또는 운동을 도모하면 망하는 날이었으며, 자신의 조직원이나 믿는 우호세력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야 되는 날이었다. 곧 시대를 역리 하면 안 되고, 옳은 뜻을 가지고 행하는 일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날이었다. 성삼문은 김질에게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박팽년의 그림으로 알려지고 있는 '설죽도'

박팽년에 대한 공초는 계속되었다. 세조가“6월 1일의 거사가 실패한 뒤에 다시 거사를 언제 도모하기로 했냐?”고 질문하자 박팽년은 “다시 거사가 이뤄질 날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관가(觀稼)를 행할 때 노상(路上)에서 하기로 했다”고 자백하였다. 관가라는 것은 음력 5월에서 9월 사이에 일 년 농사의 작황이 어떠한지, 백성의 농사 어려움은 없는지, 자연재해는 없는지를 한양성 동쪽 교외지역인 동교(東郊)나 서쪽 교외 지역인 서교(西郊)에 가서 임금이 직접 농사를 살피는 행사였다. 바로 박팽년 등은 이시기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박팽년에 대한 공초에서 단종복위 운동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6월2일 밤이 깊어지자 관련된 사람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고 피비린내 나는 하루가 끝났다.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기로 한 운동이 실패한 하루가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의 가담자는 이날 저녁에 즉시 모두 잡혀들었고, 박팽년의 공초에서 가담자의 전모가 드러났다. 박팽년은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 박중림(朴仲林)입니다.”라고 자백하여 14명이 가담하였음을 말하였다. 박팽년의 자백에 대해서 세조는 “더 가담자를 대라”고 하자 “내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결국 이날 박팽년에 대한 공초에서 단종복위 운동의 중심 가담자가 대부분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로부터 4일 뒤인 6월 6일에 단종복위 운동의 가담자들을 행위를 반역행위로 규정하고 전국의 8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백성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라’면서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실패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이날 단종복위 운동의 핵심인물이 모두 집현전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집현전을 혁파하였다. 또 거기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책들은 예문관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날 반역자로 추가된 사람은 6월 2일 박팽년의 공초에서 드러난 사람 외에 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으로 4명이 추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복위 운동의 주동인물로 파악되는 사람들의 관계를 보면, 박팽년과 그의 아버지 박중림, 박팽년의 아들 박기년 · 박대년의 순천박씨 4명,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 성승의 창령성씨 2명, 권자신과 윤영손의 처남 매부관계로서 가족관계 2명, 이외에 무장으로 유응부·송석동·박쟁 등 3명, 무인적 문인으로 김문기 1명, 문인으로 이개·하위지·류성원·이휘 4명, 기타 미상 2명이었다. 이외 허조(許慥)가 6월 6일 스스로 자결하였다. 허조는 이개의 매부였다. 모두 19명이 단종복위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남양주에 있는 세조의 무덤, 광릉
1456(세조2) 6월 7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미 박팽년이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박팽년은 6월 3일에서 6월 6일 사이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조에게 이미 죽은 박팽년 등에 대해서 의금부는 보고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박팽년·유성원·허조 등이 지난해(1455년(세조1)) 겨울부터 성삼문·이개·하위지·성승·유응부·권자신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박팽년·유성원·허조의 시체를 거열((車裂)의 형에 처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돌려 백성들에게 보일 것이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이에 더하여 명하기를, “친자식들은 모조리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고, 반역자들의 어미와 딸(母女)·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妻妾) 등은 국경선 가장자리에 있는 변방지역의 행정관청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거리 지방의 행정관청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라.”고 하였다. 철저한 응징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역사는 사건이 지난 뒤의 복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미래를 대비하고 교훈삼기위해 지난 과거를 반추하는 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실패와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역사는 여운을 남기고 또 미련을 갖게 한다. 1456(세조2)년 6월1일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 성승·유응부·박첨 등의 무사들이 들어갔다면 단종복위 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성승이 한명회라도 죽였으면 어찌 되었을까? 박팽년의 단종복위 운동이 6월 1일이 아니라, 복위 운동세력에게 하늘에서 더 힘을 실어 주는 다른 날에 벌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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