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게 나라 잃은 답답한 심정, 제주 유배지에서 시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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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풍운아이며 정치가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친필 족자가 대전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세종시 금남면 출신인 고서전문가 권용집 한밭고전원 대표가 최근 입수한 박영호의 자작시인 5언절구 한문 초서체는 박영호가 제주도에 귀향 간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박영호는 이 시에서 “水澤魚龍國 山林鳥獸家 孤舟明月夜 何處定生涯(수룡어용국 산림조수가 고주명월야 하처정생애:물과 연못은 물고기와 용이 사는 나라이고, 산과 수풀은 새와 짐승의 집인데, 달 밝은 밤 조각배같은 외로운 신세, 어느 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나)”라고 읊었다. 그 말미에 玄玄居士(현현거사) 朴泳孝(박영효)라고 쓴 이 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제주도에 귀양 와서 답답한 유배생활 속에 시름을 달랬던 제주도 월대(月臺)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월대천은 외도천(外都川)이라고도 하는데 제주도 북서부 해안에 위치한 외도2동 일대를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수령 500년이 넘은 팽나무와 250년이 넘은 소나무를 비롯한 많은 팽나무와 소나무가 하천을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달 밝은 밤에는 은은한 달빛이 물에 비친 모습이 운치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조선시대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이 시문을 읊고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이다. 맑은 수면 위로 달빛이 쏟아지면 월대천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대천 한쪽에 달빛을 감상하는 자리를 만들고 이름을 월대(月臺)라고 붙였다. 월대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월대천을 찾아와 달구경을 하면서 시를 읊었다. 박영효도 제주로 유배를 왔을 때, 이곳 월대에서 은어를 낚아 안주로 삼고 풍류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영효는 서울 출생으로 12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였다. 자는 자순(子純)이고,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박영효는 1882년 우리나라 최초로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제작하여 게양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귀국하여 제 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을 지냈다. 95년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이 되었으나 대신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907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1910년 한일 강제 합방 이후 일본의 회유로 후작(侯爵) 작위를 받고 중추원(中樞院) 고문 및 귀족원 의원을 지내 변절자로 낙인찍힌 불운한 정치인이다.
권용집 한밭고전원 대표는 “김옥균과 더불어 개화사상을 주도했던 박영효 선생이 자신들의 뜻과는 다르게 나라를 빼앗기고 제주도에 귀양 간 후 답답한 심정을 글로 남긴 것이 발견되어 다행이다”며 “구한말 젊고 유능한 정치인의 진실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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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풍운아 박영효는 누구인가 <각종 자료>
'개화파'의 영수에서 '친일'의 거두로
일제의 조선병합은 조선역사상 신시대를 획한 것……역대총독의 노력과 관민의 노력으로써 정치, 경제, 산업, 교통 등 제시설이 착착 발전해 왔으며, 이렇듯 놀라운 치적을 보게 됨은 실로 격세의 감이 있다……양 민족이 더욱 상호 이해의 정도를 깊이 하여……조선문화가 향상되고 민족의 진로가 중달(重達)케 됨을 바란다. (병합) 이래 더욱더 신정(新政)의 신장(伸張)에 힘을 다하고 산업의 개발, 문화의 발전에 노력하여 대정(大正) 10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문정(文政)에 공헌한 바는 심대한 바가 있다. 두 문장 중 위의 것은 일제 말기 박영효의 일제통치에 대한 소감이며, 아래 것은 일인들의 박영효에 대한 감사의 말이다. 일제 말기 박영효의 실존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 1935년 10월 이른바 일제의 시정 25주년을 맞이하여 박영효는 일제로부터 '시정25주년기념표창'으로 은배(銀杯) 1조를 하사받고 최대의 공로자로 '칭송'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박영효의 답례 또한 그에 걸맞는 '무게'를 갖추고 있다. 조선조 후기 개화운동 또는 부르조아 개혁운동의 정점으로서의 갑신정변 그리고 김옥균과 아울러 갑신정변의 가장 출중한 지도자로서의 박영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일제 말기 박영효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여기에 근대사 최대의 비애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출중한 개화파의 말년이 이렇게 변하게 된 데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단지 개인의 '나약함'에 그 이유를 돌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근대 민족운동의 큰 맥을 형성하고 있던 개화운동은 애초에 그런 변화의 씨앗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고, 박영효의 친일 또한 어느 정도는 예정된 궤적이었던가. 이제 그 비극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갑신정변이 품은 사상성--'친일'이라는 비극의 배태
박영효는 1861년(철종 12년) 수원에서 진사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노론 척족세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1872년 4월 12세 때에 철종의 부마(附馬)가 되었으니 그의 지위는 노론 세도가 속에서도 가히 노른자위라 할 만했다. 그의 부인이 된 영혜옹주와는 3개월 만에 사별하였으나 금릉위(錦陵尉) 정일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그는 1870년대 중반, 형 영교(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비로소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때 역관 오경석, 의관 유대치, 승려 이동인 등의 중인 출신 초기 개화 사상가들과도 교유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실학의 경세사상을 학습하는 한편, 오경석이 북경에서 가져온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청나라의 서적을 돌려보면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로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79년경에 개화당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파 내부에는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일부가 당시 영선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있다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하여 청군을 대동하고 입국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개화파의 행동은 민씨척족과도 이해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는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일군의 개화파들에게는 친청사대의 반개화(反開化)의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분화의 시초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윤식, 어윤중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는 청국의 양무파(洋務派)를 모범으로 하는 친청의 경향으로,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범으로 한 친일의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박영효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겸 수신사로 발탁되었다.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을 대동하고, 일본시찰을 떠나는 민영익, 김옥균 등과도 동행하였다. 이로 볼 때 이 때의 김옥균, 박영효의 일본행은 그들의 의도적인 행동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형식적인 임무는 임오군란 때에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일본측에 사과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교환을 무난히 수행하며 손해배상금 5십만 원 지불방법을 완화하는 것 등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질적인 목표가 다른 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고, 일본으로부터 신문물과 신제도를 도입하며, 차관을 교섭하고,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박영효 일행은 약 1개월 가량 머무는 동안 일본 조야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하여 세계 대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재무·흥산 등 일본의 개화상을 폭넓게 시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에 가서 본 것은 말로만 듣던 메이지 유신의 성과 즉 '서구화'였는데, 막상 서구화된 상태를 접하자 그들은 근대 일본의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개화사상의 비극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 해 11월에 박영효는 혼자 귀국하였으나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게 되었고, 박영효는 12월에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성판윤으로 있으면서 일본에서 후쿠자와와 약속하였던 신문발간을 돕기 위해 기술자들이 1883년 1월에 도착하자, 박문국을 창설하여 신문창간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도로의 확장과 정비, 색깔 있는 옷의 장려 등 눈에 띄는 몇 가지 개혁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활동은 민씨척족의 시기와 의심을 사게 되어 한성부의신설 사무는 정지되고, 같은 해 3월에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하였으나, 그해 12월 수구파의 모략으로 유수직마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급진개화파는 정권에서도 소외되었고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마저 민씨정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급진개화파는 국가재정난의 타개방식을 둘러싸고도 민씨정권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는 당오전 등의 악화주조를 반대하고, 울릉도와 제주도의 어채권을 담보로 일본으로부더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관도입의 시도조차 일본에게 거절당하게 되자, 급진개화파는 세력이 급속히 약해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처지에서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민씨정권과 청군을 타도할 방침을 세웠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竹添進一郞) 일본공사를 통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청불전쟁의 여파로 일부 철수한 상태에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박영효 등은 우정국 낙성식에서 개화파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정권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변 후 박영효는 새내각의 전후영사 겸 우포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본군의 무기력과 배신행위 그리고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자 박영효는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두 차례의 망명----친일의 길로
갑신정변에 실패한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에 망명하자 일본정부는 이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그들의 효용가치가 예전만 같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영효는 1885년 그의 동지 서광범, 서재필과 더불어 미국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않아 바로 일본으로 돌아와 1894년까지 약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이것이 그의 1차망명이다. 망명생활 중 일본 이름을 야마자키(山崎永春)라고 불렀으며, 1888년에 미국선교학원인 메이지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미국교회에 있으면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 2월에는 국정전반에 걸쳐 고종 앞으로 보내는 1만 3000여자나 되는 장문의 개혁상소, 이른바 '조선국 내정개혁에 관한 건백서'를 준비하여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건백서'에 나타난 그의 개혁사상은 전통적 왕조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 때 그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후쿠자와의 영향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쿠자와 등 비사쓰마·조슈계(非살摩 長州系) 인사들의 도움으로 1893년 말 도쿄에 교포학생들을 위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개설·운영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청년애국단이라는 초보적인 정치단체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었다. 1894년 5월 박영효는 본국에서 보낸 자객 이일직(李逸稙), 권동수(權東壽), 권재수(權在壽) 등의 습격을 받았으나 무사히 넘어갔다. 김옥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영효 역시 견디기 어려운 낙백의 시절인 이즈음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권토중래의 그날을 기다리며 보냈다. 그러나 김옥균이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반면에 그는 암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 등지의 개혁파 망명정객 중 자타가 공인하는 수령으로 떠올랐다. 1894년 7월 23일 일제의 경복궁 침입 이후, 일본 정부가 조선의 새정권내에 친일파 관료들을 심어 놓을 목적으로 그의 귀국을 서둘러 결정하자 이규완, 유혁로 등 5명의 측근과 2명의 일본인 경찰의 호위를 받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9월 중순 일본이 청국과의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자 조선 정계에는 일본이 조선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영효를 중심으로 조선에 강력한 친일내각을 구성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던 이노우에 공사의 추천으로, 그는 그 해 12월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왕실과 일본공사 양쪽의 신임을 얻은 박영효는 농민군과 그 관련세력을 진압하는데 앞장섬과 동시에 일본지향형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박영효는 인사를 전단(專단)하였고 '개혁'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느끼던 갑오기의 개혁은 어떤 성질의 것이었을까. 둘 다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끼게 된 그는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을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자기는 총리대신 서리가 되고 측근 이주회를 군부대신 서리에 앉혀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실권을 장악한 뒤 그는 군부 및 경찰조직 그리고 지방행정조직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때 개혁의 배후에는 물론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조선에 파견되어 갑오개혁을 조종하던 이노우에가 있었다. 그러나 곧 왕실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을미사변에 연루되자 일본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한편,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회의에서 박영효를 다시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반대파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그의 정계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마저 해산시켰다. 1900년 7월에 고베에서 이승린, 이조현, 김창한 등을 불러 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 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한규설과 윤석준에게 부탁할 목적으로 극비리에 그해 11월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복귀 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이 실의의 시간에 그는 북해도를 돌아다니며 시름을 달래고 끝없이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1907년 6월 초에야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6월 7일 서울로 올라가 궁내부고문 가토오와 접촉하고, 6월 13일에 고종의 특사조칙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각 단체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박영효 귀국환영회까지 개최되었으며, 고종은 거처를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밀사 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하였다. 이는 이완용과의 갈등에 말미암는 것이었다고 한다. 순종 즉위 후 군부내의 반양위파와 함께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년 간의 유배 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합병을 맞았다. 1910년 일제로부터 합병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후작의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았다. 이는 당시의 수작자 중에서도 아주 '품계'가 높은 것이었고 상금도 많은 것이었다. 일제로서는 개화파의 영수로서 박영효가 가지는 상징성이 조선의 통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로 보더라도 1907년의 유배가 단지 친일의 변형된 모습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여실히 드러난다. 갑신정변으로 잘못 끼운 단추는 끝내 일본에 합병된 조국의 후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된 조국에서의 박영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친일의 거두로 남았단 말인가.
민족개량주의의 중개역으로 변신한 박영효
박영효는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매국공채의 상금이 많았던 탓인지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1911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50만 원 이상의 자산가 32명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고, 권업주식회사와 조선물산무역주식회사의 발기와 운영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의 1910년대의 모습은 이와 같이 아직은 친일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고 매판자본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친일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1920년을 전후하여 민족주의자의 타협화 촉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친일활동은 다소 은폐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나 이는 총독부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 재등실과의 면회 회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에서도 그 면모를 잘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는 1919년에 설립된 조선경제회의 회장과 역시 1919년에 설립된 친일단체 유민회의 회장으로 있다가, 1921년에는 조선인산업대회의 회장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조선민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유민회를 제외하면 조선경제회나 조선인산업대회 그리고 민우회 등은 아직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여실히 지니고 있던 조선인 부르조아지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가 사주하고 있던 단체들로서, 3·1 운동 직후 조선 민족운동의 회유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단체들이다. 이로 본다면 1920년대 초반까지 박영효는 조선민족운동계로부터 타기의 대상으로 올라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일제는 파악하였던 것이고, 이에 따라 일제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인산업대회나 민우회가 민족운동의 분화에 주요한 분기점을 형성시켰고, 그것은 1923년 이후 '자치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의 변형된 모습이 나타나는 배경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여러 단체 활동과 더불어 이 시기 그의 경제활동 역시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족하다. 그는 1918년 일제의 국책 금융기관으로 발족되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로 참여하여 그 직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호남 김씨가의 주도로 1919년에 창립되는 경성방직과 1920년에 창립되는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한다.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조선인자본의 회유책으로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박영효의 이러한 경제적인 지위는 1920년대 후반 이후 경성방직이 식산은행의 거대한 대부를 바탕으로 전시경제에 참여하고, 그를 바탕으로 '식은왕국'이라는 거대한 금융독점자본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박영효가 20년대 초반에 하고 있던 단체활동과 경제활동은 민족운동의 회유에 있어 양날의 칼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1921년 11월 조선총독부 고위관료, 재류일본인 부호를 중심으로 하여 일부 조선인 대지주, 예속자본가가 함께 친목과 내선융합을 내건 친일사교단체 조선구락부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동광회조선총지부의 설립 당시 회장으로 내정되기도 했는데, 이 단체는 1922년 3월 일본 우익 정치단체인 흑룡회계의 인사들이 도쿄에 조직한 정치단체로서 서울에 조선총지부를 둔 대륙낭인이 주도한 친일단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단체에는 아직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24년 이후 민족주의운동이 타협파와 비타협파로 명백하게 분화되면서 위와 같은 민족운동의 회유책이 그 효력을 상실한 후,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친일행위를 자행한다. 이미 그는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1926년에는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의 부의장이 되어 1939년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한다. 이 밖에 그의 친일 행위는 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그것을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몇 차례 중임, 역시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1925년 조선사편수회 고문, 1924년 '훈1등 서보장(瑞寶章)' 서훈, 1926년 '이왕장의위원장', 1927년 계통농회로 성립된 조선농회의 부회장, 1934년 회장, 1928년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회 위원,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 왕공족심의회 심의원, 금융제도 조사위원, 대례기념장 서훈, 1930년 조선임산공업주식회사 대표, 조선간이생명보험주식회사 자문위원, 1936년 애국금차회 발기인, 1938년 임시교육심의위원 등. 그는 1939년 9월 죽을 때 중추원 부의장으로 년 3,500원의 봉급을 받고 있었으며, 사망하고 나자 정2위 훈1등으로 '추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시작하였던 개화운동과 일제시기에 그가 중개하여 본격화되는 '실력양성운동' 또는 자치운동과의 간격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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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는 제주에서 1907년부터 3년간 머물렀다
박영효(1861~1939)는 조선말기인 1907년에 제주로 유배됐다. 처음 그의 적거지는 산짓골이었으나 얼마 뒤 제주에 오래 있을 것으로 생각해 구남동(독짓골)에 넓은 땅을 매입해 집을 마련했다. 소위 ‘박 대신 과원’으로 불릴 정도로 농토를 일궜고 여러 과실류와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도민들에게도 적극 장려했다. 그는 또한 지방 유림들과 교류하며 근대 교육을 보급하기도 했다. 1년간의 유배생활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제주에 머무르다 만 3년이 지난 1910년 6월에야 제주를 떠났다.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의 부마(駙馬·사위)로 11세에 철종의 무남독녀 영혜옹주와 혼인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그의 인생역정을 암시라도 하듯이 당시 13세였던 영혜옹주는 혼인 3개월 만에 자식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국왕의 사위에게 주던 명예직인 정1품 금릉위(錦陵尉)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라는 영예로운 작위가 평생 따라다녔지만 왕실의 법도에 따라 재혼할 수 없었다. 한양에서는 물론 망명지인 일본이나 유배지인 제주 등지에서 여러 여인과 염문을 뿌렸으나 정식으로 인정된 부인은 없고 자식들은 모두 서출의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지난 2008년 2월, 독립기념관은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 원형을 그대로 그린 자료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태극기는 현재의 태극기처럼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칠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乾)·곤(坤)·감(坎)·리(離)의 4괘(四卦)가 그려져 있었다. 이 태극기 원형의 발굴은 이후 이보다 앞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고종황제의 지시에 의해 이미 태극기가 만들어져 사용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최초 국기 여부를 놓고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최초 제작 여부를 떠나 박영효가 처음으로 태극기를 외국에서 사용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박영효는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와서 쓴 사화기략(使和記略)에 태극기 제작 및 사용 경위를 기록해놓고 있다.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졌는데 세로는 가로의 5분의 2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이의 사괘를 그렸는데 이것은 이전에 상께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나라 국왕의 사위였던 인물답지 않게 그는 급진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다. 큰형 박영교를 따라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 등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고종 16년)에는 김옥균·서광범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왕실 법도에 묶여 활동이 제약적일 수밖에 없는 박영효에게 고종은 여러 혜택을 베풀어 18세에 오위도총부도총관, 19세에 혜민서제조, 20세에 판의금부사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락한 삶에 안주하기에 그의 사상은 이미 성숙해 있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정치적 혁신을 통해 부강한 조선을 꿈꾸며 우국 청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이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개화파와 수구파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반해 구식군대인 무위영·장어영 군병들은 열 세달 동안이나 밀린 봉급(쌀)을 모래가 섞인 쌀로 배급받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다. 1882년 6월, 이들은 폭동을 일으켜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아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 갔다. 대원군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지만 청·일의 개입으로 대원군 정권은 33일 만에 무너지고 만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청나라의 노골적 간섭을 불러들이고, 일본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압박한다. 1892년 9월, 박영효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돼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일본에 머물던 박영효는 메이지유신으로 짧은 기간에 근대화를 일궈낸 일본의 재무, 산업 분야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면서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가 필수적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1883년 초 귀국한 뒤에는 한성판윤에 임명돼 신식 경찰제도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의복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신문제작 문물을 목격한 그는 국민계몽 차원에서 신문을 발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귀국길에 일본인 인쇄공과 기자를 데리고 와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시대의 지성이었다. 1884년 12월 4일 그는 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건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한라일보> 2012년 7월 16일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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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양위에 반대한 박영효
▲ 박영효(젊은 시절 모습)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가 경무청에 갇힌 말을 들은즉, 재작야에 일본 황태자가 한국 황태자께 대리(代理) 되신 치하를 신(新)황제 되신 양으로 전보하였는지라,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신황제 되신 자격으로 답(答)전보하자 하고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는 가로되,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리하실 뿐이요, 위(位)는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황제로 답전보하리오. 만만불가하다' 하되, 이완용씨가 기어이 고집하고 듣지 아니하여 일장 힐난하다가 박영효씨가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퇴궐하여 집으로 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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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양위 찬성대신 암살혐의로 일제에 의해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
얼마 안 되어 박영효(1861~1939)는 고종 양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본 순사들에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 사실만 보면 박영효는 고종에 매우 충성스런 신하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종 재위 기간 3차례 역모를 도모했고, 2차례에 걸쳐 22년간 해외에서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박영효(젊은 시절 모습)는 12세 때 철종의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와 혼인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지만 '철종의 부마'라는 신분에 평생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1870년대 중반부터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익혔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한국과의 외교분쟁을 우려해 자신들을 박대하자 그는 서광범·서재필 등과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서광범과 서재필은 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철종의 부마' 박영효는 "양반이 아무리 하더라도 노동을 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내가 양반인 것을 알아줌으로 설마 천역(賤役)을 아니 하게 될 것이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며 7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박영효는 1894년 친일내각이 조직되자 10년 만에 복권되고 내무대신에 임명돼 갑오개혁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자신의 측근을 무리하게 요직에 기용하려다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 전복을 획책한다'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0년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의친왕)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돼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07년 6월, 12년 만에 복권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된 그가 이완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현지 주민들에게 감귤 농사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몇차례 개혁시도가 좌절된 뒤 박영효는 철저히 일본에 협력한다. 강제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 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광수와 인터뷰에서 박영효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의 전도(前途)에 대해 비관하지 않소. 왜 그런고 하면 앞으로 더 망(亡)할 나위는 없으니까. 조금씩이라도 낫게 될 것밖에는 없으니까."('동광' 1931년 3월호)
- 출처 : 2010년 10월 18일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